어느 날, 지방의 한 도시 구주에서 갑자기 남자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기이한 현상 속에서 차츰 여자들이 살아가게 되는 세상은 새로운 혼란을 겪는다. 폭력이 사라진 자리에는 천국이 있을까. 혹은 또 다른 폭력이 감돌게 될까.
극단 돌파구가 선보이는 연극 ‘지상의 여자들’이 2023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를 통해 관객을 맞는다. 박문영 작가의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연극은 하나둘씩 남자들이 사라지는 현상이 나타난 뒤의 세상을 그린다. 최근 서울 성북구의 한 카페에서 서울경제신문과 만난 전인철 연출(48·극단 돌파구 대표)은 “남자와 여자, 동물과 인간 등 존재들 사이 폭력의 이야기”라고 연극을 설명했다.
전 연출은 출판사로부터 원작을 추천받은 후 연극을 처음 구상하게 됐다. 그는 “처음에는 잘 읽히지 않아 ‘여성 연출가가 하는 게 좋지 않겠냐’고 출판사에 전하기도 했다”면서 “저도 남성이기 때문에 여성들의 상처와 위험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설이 초반에는 잘 읽히지 않았던 것 같다”고 전했다.
그러나 전 연출에게 과학(SF), 젠더, 청소년 등 미래 세상을 내다 보는 소재는 흥미로운 키워드다. 그는 2016년 카오스재단이 주최한 우주와 뇌를 설명하는 공연을 제작한 후 과학이 세상을 다르게 보게 만든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했다. “이후 블랙리스트나 미투 운동 등으로 연극 동네가 급변하는 시기를 거쳤어요. 그러면서 앞으로 다가올 세상이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죠. 최근에는 젠더 관련 많은 이슈들이 있는데, 저희가 답을 내릴 수는 없지만 공부를 통해서 이해를 거치는 과정 속에서 작품을 만들고 있습니다.”
연극은 원작에서는 짧게 등장했던 동물의 이야기도 깊이 있게 다룬다. 폭력적인 남성이 사라진 후에도 세상은 평등해지지 않는다. 분화되는 권력은 젠더를 넘어 이주민 여성과 한국인 여성, 인간과 비(非)인간의 경계를 나눈다. 전 연출은 “(구주에는) 남성과 여성, 외국인 여성, 동물들이 존재한다. 초반에 남성들에게 얻어맞거나 동물원에 갇혀 있던 동물들은 억압자인 남성들이 사라지면서 자유로워지지만, 또 다른 억압자가 나타나게 된다”면서 “그런 과정 속에서 혼란스러움, 우리가 바라는 세상이 어떤 세상이었는지를 생각하게끔 하려 했다”고 밝혔다.
무대 위에는 특별한 세트가 없다. 8명의 배우가 등장해 동등하게 이야기를 이끌어갈 예정이다. 배우들이 펼치는 동등한 무대에는 전 연출의 의지가 담겨 있다. “배우들이 두 달 가량 연습을 함께 하고도 무대에 서는 시간이 차이가 난다는 게 마음에 걸리더라”라면서 “몇 년 전부터 모든 배우가 연극이 시작하면 무대 위에 다같이 올라가 공연이 끝날 때까지 연극을 같이 만들어가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배우들은 사전 공부에도 힘을 합쳤다. 연극을 본격적으로 연습하기 전 극단 단원들이 모여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 스터디를 진행했던 것. 전 연출은 “책을 연극 연습하듯이 만나서 한 줄 한 줄 읽었다”면서 “연습에 참여하는 다양한 성별과 세대를 가진 단원들이 같이 공부하고 대화하는 시간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전인철은 SPAF 협력예술가 1기로 선정돼 창작 활동을 지원받고, 이번 작품에 이어 2025년에도 신작을 선보일 예정이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질문에 그는 “지금까지 20년 동안 연극을 알아갔는데 앞으로도 다른 무대 예술에 대해서도 더 즐기고 경험하고 싶다”고 답했다. 공연은 오는 7일부터 12일까지 국립정동극장 세실에서 열린다. 8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