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 영화'라고만 칭하기엔 모자라다. 가정폭력, 성범죄, 마약 등 파격적인 소재를 녹였음에도 그러한 소재에만 집중할 수 없는 영화가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아왔다.
'녹야'(감독 한슈아이)는 인천 여객항 보안검색대에서 일하는 진샤(판빙빙)가 우연한 계기로 만난 초록머리 여성(이주영)에게 알 수 없는 끌림을 느끼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판빙빙이 오랜 공백을 깨고 복귀한 작품이기에 많은 주목을 받았다.
진샤는 불법적인 물건을 운반하는 초록머리 여성을 보고 처음에는 적개심을 느끼지만 대책 없이 들이대는 그의 유혹에 잠깐의 일탈을 감행한다. 폭력적인 남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돈이 필요했던 진샤는 초록머리 여성의 불법적인 일을 돕는 조건으로 일행에 합류하고 평범했던 일상을 떠나 둘만의 여행에 몸을 싣는다.
처음에는 위태로웠던 그들의 여정은 점차 행복의 요소들로 채워진다. 사소한 기쁨조차 느낄 수 없었던 진샤의 삶에 즉흥적이고 알 수 없는 초록머리 여성의 행동들은 많은 의미를 부여해 준다. 처음에는 소극적이던 진샤는 점차 자신의 삶을 찾아가며 초록머리 여성에게 사랑을 느낀다.
두 여성의 로드 무비 서사는 다른 영화에서도 많이 보던 스토리다. 두 여성이 오토바이에 앉아 무작정 달리는 신, 자신들을 파괴했던 남성들을 공격하는 신, 파격적인 베드신 등 '녹야'도 클리셰로 보이는 설정들과 대사들이 난무하는 점은 아쉽다. 더불어 초반부의 경우 이러한 클리셰로 인해 스토리가 어떻게 전개될지에 대한 예상이 이뤄지는 것을 멈출 수 없다.
하지만 '녹야'의 핵심은 판빙빙, 그 자체다. 전작들에서 전혀 보지 못했던 수척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그는 가정폭력을 당하는 피해자의 역할부터 폭력의 그늘에서 벗어나 몸부림치는 과정을 처절한 연기력을 통해 스크린에 그대로 담아냈다. 특히 껌 한 통을 다 씹다 못해 목이 막혀 뱉어버리며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순간을 연기하는 신은 압도적이다 못해 보면서 숨이 쉬어지지 않을 정도의 몰입감을 선사한다.
작품의 마지막 단추는 수화다. 그들이 향해가는 결말을 설명함과 동시에 두 여성을 향한 한슈아이 감독의 응원이 담긴 장치다. "영화 속 남성들은 사회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살고 있으면서 두 여성들을 뒤에서 침몰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는, 실제로 보이지 않는, 그런 것들이 주는 고통, 공포들이 수화를 통해서 표현될 수 있었다고 생각됐다"는 한슈아이 감독의 표현처럼, 침몰당하는 여성들의 고통을 전달하는 수화, 그리고 그 과정이 상세히 기록된 초록 밤의 풍경은 그야말로 씁쓸하고 막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