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질 나쁜 애 아닐 것, 성폭행 가해자도 힘들어"…판사는 합의 권했다

지적장애인 피해자 놓고 "일반인처럼 인지 못했을 것"

5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신임 법관 임명식에 참석한 판사들이 선서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5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신임 법관 임명식에 참석한 판사들이 선서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말 질 나쁜 애는 아닌 것 같다. 피고인 나이가 어린데 합의해 줄 수 없나.”




성폭행 사건의 재판을 맡은 판사가 법정에서 이와 같이 말하며 피해자 측에게 형사 합의를 권유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지난 17일 KBS보도에 따르면 2021년 10월 대구지방법원에서는 강간치상 혐의로 기소된 17살 정모(17)군의 결심 재판이 열렸다. 정군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알게 된 지적장애인을 유인해 공원 화장실에서 성폭행한 혐의로 법정에 섰다.

피해자가 정군을 직접 마주하기 두려워했기 때문에 법정에는 피해자의 언니 A씨가 참석했다. 사건 후 피해자는 수차례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해 한때 폐쇄병동에서 입원 치료를 받을 만큼 불안한 상태를 보였다. 그리고 가족 모두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A씨는 “정군을 엄벌해달라”고 호소했지만 판사는 되레 “피해자 가족도 힘들겠지만 피고인 가족도 힘들다. 그것도 알아야 한다. 피고인 나이가 어리다”며 합의를 권했다.

관련기사



A씨가 합의 의사가 없다고 못박자 다시 판사는 “돈 받아서 동생이 좋아하는 걸 할 수 있게 해 주면 좋지 않겠냐”면서 “민사 소송을 하려고 합의를 안 하느냐. 소송 비용만 들고 보상 금액이 적은데 지금 합의해 주면 더 많은 금액을 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 과정에서 판사는 피해자를 비하하는 듯한 발언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정군이 보호처분이나 형사처벌 전력이 없는 점을 들며 “정말 질 나쁜 애는 아닐 것”이라며 “(피해자가) 지적 장애인이니까 일반인처럼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재판을 마치고 나온 A씨는 트라우마 증상을 보여 응급실로 옮겨졌다. A씨는 “속으로 계속 ‘무슨 헛소리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동생이 정신과 약을 하루에 열 알이 넘게 먹고 힘들어하는데. 애 살려보겠다고 (엄벌해 달라) 하는 건데. (판사가) 말 몇 마디로 우리를 다시 죽음에 내몬 것”이라고 KBS에 전했다.

재판부는 이어진 선고공판에서 정군의 강간치상 혐의 사건을 소년부로 송치하는 결정을 내렸다. 앞서 결심공판에서 검찰이 징역 6년을 구형했으나 형사처벌 대신 소년 보호처분을 받도록 선처한 것이다.

김영배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대법원으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A씨는 지난해 7월 “재판장이 피해자에게 합의를 강요하고, 피고인도 피해자만큼 힘들다는 등 피해자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발언으로 피해자 가족들에게 2차 가해를 하여 신체적, 정신적인 피해를 입었다”며 “성인지 감수성이 없는 재판장이 법정에서 이러한 발언을 하지 않도록 해달라”는 내용으로 대법원에 진정을 제기했다.

그렇지만 대법원은 “소송지휘권의 범위를 벗어난 재판 진행이나 부적절한 언행을 확인할 수 없었다”는 민원회신을 보냈다.

그러나 국가인권위원회의 판단은 달랐다. 인권위 침해구제 1위원회는 재판장의 부적절한 발언으로 피해자 측의 인권이 침해된 사실을 인정하고 법원행정처장에게 후속 조치를 권고했다. 또 해당 판사는 법관의 재판은 조사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인권위는 “재판 절차나 소송지휘에 필요한 발언이 아닌 당사자를 모욕하거나 명예를 실추하는 발언은 허용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김 의원실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이처럼 법관의 부적절한 법정 언행과 관련해 대법원 윤리감사1심의관실이 접수한 진정은 17건이었다. 하지만 모두 ‘부적절한 언행을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주의 조치나 징계 청구 없이 모두 단순 종결됐다.


김태원 기자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