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정여울의 언어정담] 죽음을 기억하는 사물을 바라보며

작가

죽음의 정물 두고 집필하는 제롬 처럼

내안 절박함으로 글쓰기 멈출수 없어

열정 담은 글, 작은 희망 전해줬으면






화가 카라바지오가 그린 ‘글을 쓰는 성(聖) 제롬’이라는 작품에는 책상 위 해골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가운데 마치 사생결단을 하듯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 사람 나 꼭 닮지 않았어?” 내 말을 들은 친구는 이렇게 대답한다. “거참, 너는 글 쓰는 사람만 보면 다 너 닮았다니?” 나는 그런 사람 아니라고 딱 잡아떼지만, 허를 찔린 느낌이다. 내가 무턱대고 좋아서 엎어지는 사람들이 있다. 이렇듯 모든 것을 걸고 글을 쓰는 사람에만 내적 친밀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다. 어딜 가든 책 읽는 사람, 종이 위에 기록된 무언가를 열심히 읽는 사람만 보면, 나는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워한다. 특히 성 제롬에게 내가 깊은 내적 친밀감을 느끼는 이유는 그 절박함 때문이다. 그는 일부러 해골을 눈앞에 둔 것 같다. 해골을 바라볼 때마다 다가오는 죽음을 생각한다. 다가오는 죽음을 생각하면, 아무리 힘들어도 글쓰기를 멈출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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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또한 그렇다. 최근에 시력이 급격히 나빠지면서, 더욱 성 제롬을 떠올리는 일이 많아졌다. 눈에서 자꾸만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난다. 슬퍼서 흘리는 눈물이라면 카타르시스라도 느낄 텐데, 이 눈물은 안구건조증 때문이다. 내 눈과 손가락을 과도하게 혹사시키며 지금까지 수많은 책을 써온 나이기에, 눈이나 손목이 조금이라도 나빠지면 덜컥 겁이 난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는다. 죽음이 언제 닥쳐올지 모르므로. 약해지는 시력도, 아무리 병원에 다녀도 낫지 않는 허리 통증도, 자꾸만 고유명사를 깜빡깜빡 잊어버리는 이 허약해진 기억력도, 모두 나에게는 ‘성 제롬의 해골’처럼 느껴진다. 오죽하면 해골을 눈앞에 두고 글을 쓰겠는가. 성 제롬은 죽음과 맞설 수 있는 용기가 있는 사람이다. 죽음을 연상시키는 바니타스(vanitas, 해골이나 문구류를 비롯한 정물들)를 멀리 책상 바깥으로 치워놓은 것이 아니라, 그 모든 명백한 죽음의 상징들을 책상 위에 가득 늘어놓고 글을 쓰다니. 나에게도 이런 못 말리는 집념이 있다. 하이퍼그라피아라는 질병이 있는데, 글쓰기 중독이라는 병이다. 글을 쓰지 않으면 미칠 것 같은 느낌, 글을 써야만 비로소 내가 되는 느낌, 나는 그 느낌조차 사랑한다.

한 문장이라도 더 쓰고 싶은데, 시간은 부족하고, 육체는 말을 듣지 않고, 아이디어는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영감이 떠오르면 쓰는 것이 아니라, 글을 써야 영감이 떠오른다. 나는 그렇다. 영감이 떠오를 때만 글을 쓴다면 일 년에 몇 번이나 좋은 생각이 나겠는가. 아무리 힘들어도 그저 묵묵히 내 안의 투덜거림을 멈추고 책상에 앉아 글을 쓰면, 내 간절함의 온도에 놀라 내 무의식 어딘가가 글쓰기의 스위치를 누르는 것만 같다. 이런 테마를 써봐, 이런 이야기를 펼쳐봐, 끊임없이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그 알 수 없는 내 안의 목소리를 나침반 삼아 오늘도 글을 쓴다. 성 제롬에게 해골과 온갖 필기도구와 책상 위의 소품들은 이렇게 속삭이는 것이 아닐까. 오늘은 단 한 번뿐이니, 이 시간을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답고 찬란하게 불살라버리라. 시간이 품고 있는 가장 뜨거운 에너지를 내 글 속에 담을 수 있다면. 나의 열정이 당신의 마음 속에 아주 작은 희망의 등불을 켤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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