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에서 대출을 받은 사람은 원금과 이자를 성실하게 상환할 의무가 있다. 자본주의경제의 기본이다. 벌이가 시원치 않다고 원리금을 갚지 않는 이들이 늘면 은행의 연체율이 치솟고 건전성이 악화될 것이다. 은행이 휘청거릴 정도로 위험해지면 허리띠를 졸라매 모은 돈으로 예금에 가입한 선량한 서민들에게 피해가 돌아간다.
힘들게 일해 번 돈이 은행 원리금으로 다 빠져나가고 남는 게 없으면 허탈하다. 실제로 매달 은행 이자 갚고 직원들 월급 주고 나면 적자라는 자영업자들이 많다. ‘영끌’로 대출받아 집을 산 후 이자 갚느라 허덕이면서 ‘내 집은 은행과 공동 소유’라며 자조적으로 말하는 이들도 부지기수다. 그렇다고 이런 상황에 대해 ‘돈을 빌려준 은행의 잘못’이라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30일 열린 국무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고금리로 어려운 소상공인들께서는 죽도록 일해서 번 돈을 고스란히 대출 원리금 상환에 갖다 바치는 현실에 ‘마치 은행의 종노릇을 하는 것 같다’며 깊은 한숨을 쉬셨다”며 참모진이 민생 현장에서 청취한 내용을 소개했다.
은행에서 돈을 빌려 열심히 장사를 했는데도 남는 게 없으면 뭐가 잘못된 걸까. 무리하게 대출을 받아 내 집을 마련하고는 원리금 상환이 어려워 쩔쩔매는 이들은 누구를 탓해야 하나. 대통령의 발언은 소상공인들의 절박한 상황을 전달한 것으로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이자 장사로 배를 불리고 있는 은행들의 행태를 지적한 것으로 보인다. 소상공인이 이렇게 어려운 것이 마치 고금리로 대출해주고 따박따박 이자를 받아가는 은행들 때문인 것처럼 해석될 우려가 있다.
하지만 주목할 부분은 소상공인들이 은행에 빌린 돈을 갚는 ‘행위’가 아니라 원리금을 갚고도 남을 만큼 충분히 돈을 벌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죽도록 일했는데도 먹고살 만큼 돈을 벌지 못한다면 경제 시스템이 잘못된 것 아닌가.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 이들에게 고금리로 돈을 빌려준 은행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을까.
대통령의 발언은 최근 금융 당국이 은행에 부담금 부과 등의 방식으로 초과이익을 환수하는 횡재세 도입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나온 발언이라 더욱 관심을 모으고 있다. 윤 대통령은 올해 초에도 은행들의 막대한 성과급 지급을 ‘돈 잔치’에 비유하며 은행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드러낸 전력도 있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은행 고금리로 소상공인이 어려우니 금리를 낮춰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한편 가계부채가 늘어나지 못하도록 은행들이 주택담보대출 등의 금리를 올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올 하반기 들어 은행권에서 50년 만기 주담대를 잇따라 출시하면서 가계대출이 빠르게 증가하자 은행들은 가계부채 증가의 주범으로 몰렸다. 정부가 연초 특례보금자리론을 통해 먼저 선보인 50년 만기 주담대를 뒤따라 내놓은 것인데도 애꿎은 은행들만 뭇매를 맞았다. 결국 은행들은 줄줄이 50년 만기 상품 판매를 중단했다. 이후에도 은행들은 당국의 눈치를 보며 가산금리를 얹거나 우대금리를 없애는 등의 방식으로 대출금리를 높여 가계대출이 늘어나지 않도록 관리에 나선 상태다.
이처럼 대출을 틀어막는데도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 등 5대 시중은행의 10월 가계대출은 2년 만에 가장 많은 2조 4723억 원이 늘었다. 하지만 당국은 최근 고금리 상황에서 가계대출이 빠르게 증가하는 추세는 애써 외면한 채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에만 집착하면서 이전 정부에 비해 낮아졌다고만 강조하고 있다.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원인을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다. 대출을 받은 자가 제때 원리금을 상환하는 것을 ‘은행에 갖다 바치는 종노릇’이라고 한다면 대한민국에서 종이 아닌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자 장사로 수익을 많이 낸 은행들에 대규모 서민금융 지원금을 받아낸다고 해서 소상공인이 이자도 갚기 어려운 경제 상황이 바뀔 것이라고 생각하면 착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