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9일 정부는 필수의료 혁신전략을 발표했습니다. 핵심 내용 중 하나는 고령화에 대응해 의료수요가 폭증을
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18년 동안 동일했던 의대정원을 늘려나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늘어난 의료인들을 붕괴되가고 있는 지역·필수의료 분야에 우선적으로 투입하겠다는 정부 의지도 나타냈죠.
국민 여론은 대체적으로 의대정원 확대에 공감하고 있습니다. 의료계와의 협의를 이뤄내느냐가 가장 큰 관건이죠.
의료계는 "의사 숫자가 늘어난다고 지역·필수의료 분야에 의료진 공급이 늘어나진 않는다. 필수의료 분야에 대한
수가를 올려주는 게 선행과제다. 의사 숫자가 늘어나면 과잉진료가 늘어나 국민부담이 늘어나고 건강보험 재정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라고 주장하며 의대정원 확대에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정부에서는 당근책 마련은 물론 소통강화에 총력전을 펼치고 있습니다. 보건복지부는 지난달 26일 제15차 의료현안협의체를 개최했는데요. 의대정원 확대 내용이 포함된 대책을 발표한 지 일주일 만입니다. 의료현안협의체는 복지부와 대한의사협회(이하 의협)가 국민의 건강증진과 보건의료 발전에 필요한 주요 의료현안을 논의하기 위해 진행해온 협의기구입니다. 정부가 의대정원 확대를 발표한 후 진행한 첫 회의였는데요. 회의장에서는 정부와 의료계 간 팽팽한 기운이 느껴졌다고 합니다. 이날 회의에서 양측은 의대정원 확대 얘기보다는 '의료인의 의료사고 법적부담 완화', '현장의 애로사항 개선', '적정한 보상체계 구축' 등 필수의료 분야의 정책패키지에 대해서만 논의를 진행했습니다.
지난달 31일 저녁 기자들에게는 긴급 문자가 왔습니다.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이 의학한림원의 원로·중진들을 만나 의대정원 확대와 관련한 의견을 수렴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의학한림원은 의료와 관련 분야 석학으로 구성된 학술단체입니다. 이날 간담회에는 왕규창 의학한림원 원장(국립암센터 신경외과), 한희철 부원장(고려대), 이종구 교수(서울대), 박혜숙 교수(이화여대) 등이 참석했습니다. 조 장관은 "(의대정원 확대를 포함한) 필수의료 종합 정책패키지가 효과적으로 작동하도록 의료현장과 학계의 의견을 두루 경청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복지부는 곧바로 다음날 정부서울청사에서 제2차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이하 보정심)을 개최했습니다. 보정심은
보건의료법에 근거해 관련 주요 정책을 심의하는 기구인데요. 정부부처 차관급 7명과 수요자 대표,공급자 대표(각각 6명), 전문가(5명)가 참여합니다. 이날 회의에서 조규홍 장관은 "과학적 근거와 통계에 기반한 의사인력 수급정책과 필수의료로의 인력유입을 지원하는 정책패키지를 다각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며 "수술 등 중증치료를 회피하게 만드는 의료사고의 법적부담을 완화하고 중증응급과 고난도,고위험 행위에 걸맞은 충분한 보상을 제공하겠다"고 강조했습니다.
의협은 정부가 '의료현안협의체'가 아닌 다른 협의체에서 논의하는 것에 불만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2020년 의료계 총파업 당시 정부와 의료계가 9·4 의정합의를 통해 의대 정원을 포함한 주요 의료정책을 정부와 의료계 간 구성된 의정협의체를 통해 논의하는 데 합의하고 일방적인 정책추진을 강행하지 않기로 약속한 것을 지키라는 입장입니다. 정부는 대국민 소통창구를 다양화해 나가겠다는 입장입니다. 올해 의대정원 문제를 놓고 의료계와 10여차례 넘게
의료현안협의체를 진행했지만 이렇다 할 소득이 없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소비자단체와 의대정원 확대에 긍정적인
분석을 내놓고 있는 전문가들이 포함된 보정심에 정부의 무게추가 기울어 가는 모습입니다.
정부는 지난 2일 의협과 제16차 의료현안협의체를 진행했습니다. 이날 회의에서 의협은 의대정원 증원은 과학적 통계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는 입장을 피력했는데요. 이광래 인천광역시의사회장은 "의대를 지망하는 수험생과 학부모, 학원, 거주지역에 의대설립을 원하는 사람 등 많은 국민들이 각자의 이익에 따라 의대정원 증원을 외치고 있다"며 "이런 상황에서 모인 여론에 따라 의대 증원과 의과대학 설립을 해야 하느냐"고 반문했습니다. 그는 이어 "한국의 의사와 환자 간 평균 거리는 0.86㎞로 의료접근성은 세계 최고"라며 "오직 과학적 근거에 따라 의대정원을 책정해야 한다"고 의대정원 증원에 사실상 반대의견을 피력했습니다.
정부는 전공의(레지던트)들이 필수의료 분야를 꺼리는 주요 원인 중 하나인 의료분쟁 부담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2차례에 걸친 국무총리 주재 관계부처 차관회의를 통해 관련 패키지를 마련하고 있고, 지난 2일 박민수 복지부 2차관이 '의료분쟁 제도개선 협의체' 첫 회의도 진행했습니다. 국회에서도 필수의료 분야 진료시 발생한 의료사고에 대해 국가부담을 늘리는 법안마련에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현재 불가항력 사망사고에 대해 국가가 부담을 하는 분야는 산부인과 밖에 없습니다. 의료사고가 발생하면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 의료보상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환자 측에 최대 3000만원을 보상하는 구조입니다. 현재는 이 가운데 70%를 국가가, 30%를 병의원이 내지만 지난 5월 법안이 통과돼 다음달 14일부턴 정부가 전액 부담합니다. 최근 신현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소아청소년과에서 발생한 불가항력 의료사고에 대한 보상금을 국가가 전액부담하는 내용의 ‘의료분쟁조정법’을 발의했습니다.
저출산 문제가 심각해지자 그동안 관련 제도 도입에 미온적이던 재정당국이 전향적으로 바뀌었다는 후문입니다. 현재 국회 다수석을 차지하고 있는 민주당이 발의한 법안인데다 여당인 국민의힘에서 의대정원 확대와 필수의료 강화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만큼 복지부까지 동의하면 국회 통과과 유력할 것으로 보입니다.
의협은 의대정원 증원에 과학적인 근거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고 정부는 과학적인 근거에 입각해 의사 수를 늘려나가겠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사회현상을 둘러싼 해석은 언제나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팽팽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인데요. 의대정원 증원은 최근 우리가 맞닥뜨린 이슈 가운데 가장 입장이 엇갈리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정부의 총력전이 효과를 발휘할지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