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목요일 아침에] 문제는 정치 리더십이다

최형욱 논설위원

‘한강의 신화’는 도전 맞선 응전 역사

숱한 위기 속 경제체질 더 단단해져

잠재성장률 하락에도 특유 강점 여전

리더십이 ‘한국형 선진국’ 도약 관건





지난달 윤석열 대통령의 중동 순방 이후 ‘제2의 중동 특수’가 재연되면서 저성장 국면을 돌파할 디딤돌이 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40년 전 제1차 중동 진출은 국가적 위기 극복을 위한 더 사활적 과제였다. 1973년 1차 오일쇼크가 발생하자 물가가 폭등한 가운데 전 세계적인 경기 침체로 수출이 줄면서 무역 적자 규모가 커졌다. 박정희 정부는 위기의 진원지에서 달러를 벌어들인다는 역발상으로 활로를 뚫었다. 우리 경제는 건설 업체들이 극한의 더위에서 가져온 오일달러에 힘입어 불과 3년 만에 고성장 기조로 복귀했고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 산업구조를 재편하는 데도 성공했다.

20세기 들어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한 나라는 아일랜드 외에 한국이 유일하다. 그 과정은 숱한 실패와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우리 경제는 대내외적인 환경 변화로 도전에 직면하면 반드시 응전해 기회를 창출했다. 한 번 위기를 겪으면 ‘중진국 함정’에 빠져 주저앉았던 다른 경쟁국과는 달랐다. 1970년대 초반에는 고금리로 사채를 빌려 쓰던 기업들이 대규모 부실화하며 경제 위기가 발생했다. 정부는 사채 동결 조치를 통해 기업 체질을 강화했고 주식·채권 등 국내 자본시장 성장의 초석을 마련했다. 1997년 외환 위기는 미셸 캉드쉬 전 국제통화기금(IMF) 총재가 “위기로 위장된 축복”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위기 극복 과정에서 부실 기업과 금융기관이 대거 정리됐고 우리 경제의 투명성과 대외 개방성, 리스크 관리 능력 등이 선진국 수준으로 올라갔다.



그 중심에는 이념적 성향과는 무관하게 경제 분야만큼은 실용 노선을 폈던 대통령들이 있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적성국과의 북방 외교로 중국 시장이라는 새로운 성장 동력을 마련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통해 안보 중심의 한미 동맹을 경제·산업·기술 분야로 넓혀 제조업의 선진화를 촉진했다. 2000년대 후반 한국이 신흥국의 야성(野性)에다 선진국의 안정성까지 갖추자 골드만삭스 등 미국 월가의 투자은행(IB)들은 “세계 국가들이 한국을 롤모델로 삼아야 한다”며 경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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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최근 우리 경제가 정점을 찍고 내리막에 들어섰다는 ‘피크 코리아’ 전망이 고개를 들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최근 한국의 내년 잠재성장률이 1.7%로 떨어져 미국(1.9%)보다 낮아질 것으로 내다봤다. 골드만삭스는 지난해 말 보고서에서 2050년이면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규모가 인도네시아·이집트·나이지리아에도 밀리면서 15위권 밖으로 떨어질 것으로 전망했다.

사실 우리 경제가 직면한 위기는 복합적이다. 신중동 전쟁 가능성 등 지정학적 리스크에다 미국의 고금리 장기화, 미중 간 공급망 갈등 등 대외 환경이 악화하는 가운데 가계 부채와 국가 채무 급증 등의 내부 리스크를 안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한국 경제 특유의 역동성과 회복 탄력성이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잠재성장률을 올리려면 생산성 향상을 위해 노동 등 구조 개혁이 필수다. 말은 쉽지만 누군가의 희생을 필요로 한다. 반면 부와 소득의 양극화 심화, 진영 간 대립 격화 등의 여파로 이해관계자 간의 갈등을 조정하고 국민적 에너지를 응집할 정치적 리더십은 고갈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 경제에 암울한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반도체·자동차·조선·방위산업 등 다양한 산업군에 걸쳐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고 있고 민간의 혁신 능력도 아직 탁월하다. 선진화된 경제 제도, 투명한 금융시장, 우수 인재와 교육열 등도 강점이다. 저출산·고령화 현상 역시 노동 절약형 고부가가치 산업을 육성하면 1인당 소득과 삶의 질을 더 높이는 기회 요인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인구가 줄고 있어 윤 대통령의 공약처럼 한국이 주요 5개국(G5)이 되지 못하더라도 국민은 세계 5위의 부자가 될 수는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기로에 선 우리 경제는 어디로 나아갈까. 아직은 알 수 없다. 대통령이나 정치권이 국민에게 미래 세대를 위한 피와 땀을 호소하며 구조 개혁에 성공한다면 한국 경제는 또 한 번의 성장 스토리를 쓰면서 ‘한국형 선진국 모델’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정치적 이득을 위해 기업 때리기 등 유권자들의 환심만 사려 한다면 일본식 장기 저성장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결국 정치 리더십에 달린 문제다.

최형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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