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청론직설] “기업 역동성 키우려면 정부가 규제 타파의 ‘퍼스트 무버’ 돼야”

◆이근 서울대 경제학부 석좌교수

韓 경제 성장동력 약화…美의 70% ‘벽’에서 정체될 수도

성장 친화적 복지 정책을 펴고 노동시장 유연성 제고해야

신산업 규제 해소, 중소기업 ‘피터팬 증후군’ 타파도 시급

내부 시스템 개선해야 도약…3대 개혁에 사활을 걸어야

이근 서울대 경제학부 석좌교수가 8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국 경제의 성장 동력 강화를 위한 구조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성형주 기자이근 서울대 경제학부 석좌교수가 8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국 경제의 성장 동력 강화를 위한 구조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성형주 기자




우리 경제가 선진국 반열에 오르기가 무섭게 성장 동력을 잃어가고 있다. 2021년 세계 10위이던 경제력은 지난해 13위로 밀려났고 올해 경제성장률은 25년 만에 일본에 역전당할 것이 확실시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한국의 잠재성장률이 올해 처음으로 2%를 밑도는 데 이어 내년에는 세계 최대 경제국인 미국보다 낮은 1.7%에 그칠 것으로 예측했다. 후발국의 선진국 추격에 대해 연구하는 ‘경제 추격론’의 권위자인 이근 서울대 경제학부 석좌교수는 8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정부가 신산업 분야에서 누구보다 빨리 규제를 풀어주는 ‘퍼스트무버’가 돼야 기업의 역동성을 키워 성장 동력을 강화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이어 저출산이 심화하는 한국 경제의 성장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노동유연성을 제고해 노동생산성을 높이는 것이 필수라면서 “윤석열 정부가 돌파력을 발휘해 노동·연금·교육 3대 개혁 추진에 속도를 내야 한다”고 주문했다.






-우리 경제의 성장 동력이 급격히 약화하고 있다. 한국의 선진 경제 추격이 어디쯤 와 있다고 봐야 하는가.

△우리나라는 물가를 감안한 구매력평가지수(PPP) 기준 1인당 소득이 미국의 70% 수준이다. 아직 추격할 여지가 많다. 문제는 그 격차를 좁히는 속도가 빠르게 둔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5년간 미국과의 격차를 2%포인트 줄였는데, 그 이전 5년간 4%포인트 줄인 것과 비교하면 절반 수준이다. 이 추세라면 향후 5년은 1%포인트 추격으로 줄어들게 된다. 이런 식이라면 30%의 격차를 따라잡는 데 150년이 걸린다는 계산이 나온다. 결국 추격을 완성하지 못한 채 70% 선에서 정체될 수 있다.

-미국 경제의 독주가 심화하고 있는 것 같다.

△달러화 패권을 쥐고 있는 데다 경제 규모가 큰 미국이 산업 정책을 펼치고 보조금까지 주니 모두 미국으로 몰리게 된 것이다. 지금 미국은 외국인직접투자(FDI)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다. 실업률은 3.8%로 사실상 완전고용 수준이다. 인플레이션이 떨어지지 않으니 금리를 낮추지도 못한다. 반면 다른 나라들은 불황에 허덕인다. 미국이 다른 나라의 희생을 발판 삼아 혼자 잘 나가고 있는 세계 경제 상황에는 근본적인 모순이 있다.

-한국 경제의 역동성이 떨어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거시적으로는 인구 감소로 노동력이 줄고 투자까지 축소되면서 성장이 정체되고 있다. 다만 산업 측면에서는 아직 역동성이 살아 있다. 소수의 대기업이 정보기술(IT)이라는 핵심 분야에서 성장을 거듭해왔고 지금은 바이오·방위 산업 등이 신산업 분야로 진입하고 있다. 국민 경제의 비역동성, 즉 침체된 민생과 산업 분야의 괴리가 커지는 것이 문제인데 그런 면에서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훨씬 더 정교한 정책 없이는 국민 불안이 더욱 커질 것이다. 괴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복지와 성장이 조화를 이루는 성장 친화적 복지 정책을 펴야 한다. 대표적인 것이 여성 고용률을 높이기 위한 출산·육아·보육 관련 사회 기초 서비스를 확충하는 것이다. 근본적으로는 노동시장의 유연성과 안전성을 제고하도록 재교육을 포함한 유럽식의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을 펼쳐야 한다.

이근 서울대 교수가 8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국 경제의 현주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성형주 기자이근 서울대 교수가 8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국 경제의 현주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성형주 기자


-우리 기업들도 아직은 ‘퍼스트무버’가 아닌 ‘패스트팔로어’에 머물고 있는 듯 보인다.

△퍼스트무버가 돼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야 한다. 한국처럼 시장 규모가 작고 규제가 많은 나라에서 퍼스트무버가 되려는 것은 위험한 전략이다. 자칫 퍼스트무버가 ‘퍼스트루저’가 될 수 있다. 우리에게는 세계 시장이 열리고 표준이 성립되면 누구보다 빨리 제품을 제조해낼 능력이 있다. 세컨드만 돼도 충분하다. 정부는 외국들이 규제를 다 푼 다음에야 푸는 팔로어인데 기업만 퍼스트무버가 될 수는 없다. 정부가 누구보다 빨리 규제를 풀 수 있는 퍼스트무버가 돼야 한다.

-구체적으로 어떤 규제를 푸는 것이 가장 시급한가.

△‘타다’의 사례에서 보듯이 공유 차량, 에어비앤비 같은 공유 주택 및 유전자치료, 원격의료 등 신산업 분야에서 규제가 많다. 새 제품이나 서비스에 대해 기존 규제를 면제·유예해주는 규제 샌드박스 제도가 있지만 2년 뒤 연장 적용을 받지 못하면 그동안의 투자가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 기업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도록 하려면 자동 연장제를 도입해야 한다. 또 우리 경제의 대기업 주도성이 지적되는데 외려 대기업이 부족한 것이 문제다. 삼성 같은 기업 5개만 더 있어도 경제가 살아난다. 기업들이 지금처럼 정부 지원 혜택을 누리기 위해 중소 규모에 머물려는 ‘피터팬증후군’에서 벗어나 대기업이 되는 선순환을 일으켜야 한다. 그러려면 스타트업이 대기업에 인수돼 유연하게 엑시트할 수 있도록 규제를 풀어야 하고 대학생보다는 대기업 종사자들이 창업을 하도록 장려해야 한다.

-산업구조적으로 지나치게 반도체에 의존한다는 지적도 있다. ‘제2의 반도체’가 될 만한 산업 분야는 무엇인가.



△한국은 대만과 같은 반도체 강국이지만 반도체 외에 대안이 없는 대만에 비해 강점이 있다. 최근 반도체 불황기에는 자동차 산업이 이윤을 냈고 코로나19를 계기로 바이오 산업에도 기회의 창이 열렸다. 바이오의 경우 10대 그룹 중 8곳이 투자에 나서고 있다. 바이오는 사이클이 길고 진입 장벽이 높은 선진국형 산업이어서 IT에 비해 중국의 추격도 쉽지 않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방위 산업에서도 한국산이 부각되고 있다. 그런 면에서 한국 산업은 호기를 맞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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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한국의 잠재성장률이 미국보다 낮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우리 경제의 성장력을 높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근본적으로 출산율과 고용률이 문제인데, 출산율을 높이기는 단기적으로 쉽지 않다. 그렇다면 현재 인구를 잘 활용할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여성·고령자의 노동 참여 확대와 외국 인력 도입, 고용 유연·안전성 제고를 통해 노동생산성을 끌어올리는 것이 답이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정부의 노동 개혁 방향성은 맞는데 제대로 추진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연금 개혁도 마찬가지다. 3대 개혁이라는 좋은 어젠다를 제시하고도 이를 밀어붙일 돌파력이 보이지 않는다.

-올해 일본의 경제성장률이 한국을 앞지를 것이 확실시되는 가운데 중국의 성장 동력은 눈에 띄게 약해졌다. 일본과 중국 경제를 어떻게 진단하는가.

△일본은 엔화 약세 덕을 보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소비가 약해 한국보다 동력이 약하다. 중국은 잠재적 역량이 높지만 이념에 기반한 정책들이 민간의 역량을 억누르고 있다. 조금만 규제를 풀어도 경제가 크게 살아나겠지만 지금 중국 당국은 성장보다 사회주의적 가치를 중시하는 듯하다.

-중국이 미국을 앞지를 수 있겠는가.

△중국의 경제 규모가 미국과의 격차를 가장 좁힌 ‘차이나피크’는 2021년이었다. 당시 미국의 76.2%까지 올라섰다가 올해는 65%대로 떨어졌다. 과도한 코로나19 봉쇄의 후유증과 미국의 견제에 발목이 잡힌 중국과 달리 미국 경제는 여전히 성장력이 강하기 때문에 앞으로 당분간은 중국이 미국의 70% 내외 수준에 머물 것으로 본다. 초장기 추세는 두고 봐야겠지만 상당 기간 중국이 미국과의 격차를 좁히기는 어려울 것이다. 미국의 주도성이 얼마간 유지될 것 같다.

-한국이 가장 경계해야 할 추격 국가를 꼽는다면.

△중국이다. 중국이 빅테크 등 한국을 이미 추월한 분야도 있지만 많은 분야에서 경합 중이고, 경합도 자체도 높아지고 있다. 자동차부터 배터리·조선 등 주력 제조업 분야가 모두 한국과 겹친다. 그나마 미국이 중국 첨단산업을 견제하는 덕에 우리가 시간을 벌고 있다. 미국이 아니었다면 반도체도 중국에 더 빨리 추월당했을 수 있다. 10년 정도 시간을 번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중 갈등 구도는 한국에 유리한 측면도 있다. 중국 기업이 없는 미국 시장, 미국이 발을 뺀 중국 시장에서 한국의 교섭력(bargaining power)은 커졌다. 이 시간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윤석열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혁신 성장을 강조해왔다. 혁신이라는 관점에서 윤석열 정부의 정책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윤석열 정부는 미중 갈등과 공급망 교란 상황에서 반도체 분야를 집중 지원해왔다. 그것은 좋은데, 그게 전부여서는 안 된다. 특히 연구개발(R&D) 지원 삭감은 효율성 추구라는 목적을 감안하더라도 아쉬운 부분이다. 미래 발전의 기반이 될 핵심적인 인풋(input)을 줄이는 것은 잘못이다. 예산의 비효율성을 낮추는 데는 지방교육재정교부금 배정을 초등교육에서 고등교육으로 과감하게 돌리는 것으로도 충분히 효과를 낼 수 있다. 반발이 있겠지만 기득권의 반대를 과감하게 극복하면서 치고 나가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윤석열 정부의 정책에 대해 조언한다면.

△최근 출간된 공저서 ‘2024 한국경제 대전망’에서 지적됐듯이 탈(脫)세계화의 귀결은 국가의 귀환이다. 이제 눈을 안으로 돌려 내부 시스템을 개선해 다음 단계로 도약해야 한다.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노동·연금·교육 3대 개혁을 어렵더라도 제대로 해야 한다. 그것이 저출산 문제의 해결을 위한 처방이기도 하다. 개혁에 사활을 걸어야 정치적으로도 득이 될 것이다.

◆He is…

1960년 서울에서 태어나 관악고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제슘페터학회(ISS) 회장과 유엔본부 개발정책위원 등을 지냈으며 비서구권 대학 교수로는 처음으로 ISS가 수여하는 슘페터상을 받았다.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과 한국국제경제학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서울대 비교경제연구센터장과 경제추격연구소 이사장을 맡고 있다.

신경립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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