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는 서든 데스(Sudden Death·돌연사)를 대비하기 위한 결정을 내려야 했습니다."
나경수 SK지오센트릭 사장은 세계 첫 플라스틱 재활용 복합단지 기공식을 하루 앞둔 지난 14일 다소 비장하게 과거를 회상했다. 서든 데스는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지난 2016년 사업의 위기를 강조하기 위해 처음 제시한 화두로 최근 7년 만에 다시 언급해 주목을 받았다.
최 회장이 서든 데스를 처음 꺼내든 시기만해도 SK지오센트릭은 굴뚝기업의 대명사로서 조단위 수익을 내는 SK그룹의 든든한 캐시카우였다. SK지오센트릭은 1972년 국내 최초의 화학공장인 나프타 분해시설(NCC)를 지으며 울산석유화학단지를 조성했다. 단지를 조성한 10월 31일이 '화학산업의 날'로 지정될 만큼 존재 자체만으로 우리나라 석유화학 역사의 상징이었다.
SK지오센트릭은 연간 20만 톤의 에틸렌을 생산하며 2000년대 초반부터 2010년 초반까지 이어진 화학산업 호황기의 최선두에 있었다. 하지만 SK지오센트릭은 50년 영광의 역사를 뒤로하고 3년 만에 그야말로 환골탈태를 했다. 더 이상 기존의 화학산업에서 수익성을 내기 힘들 것이라는 냉철한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굴뚝기업의 대명사, 48년 만에 공장 불을 끄다
시작은 우리나라 화학산업의 시작을 알린 NCC의 가동 중단이었다. 국내 화학기업들은 2011년 이후 중국의 공장 증설과 에틸렌 공급 과잉으로 시장 경쟁이 치열해지며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중국 자국 내 생산이 늘어나자 한국산 화학제품 수익이 크게 줄어든 것이다. 내리막길은 생각보다 가팔랐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세계 경기가 마비되면서 한국기업들은 줄줄이 적자로 돌아섰다.
상황이 이렇자 SK지오센트릭은 빠른 판단에 나섰다. 살아남기 위한 변신이 절실했다. 그렇게 2020년 NCC 공장의 불을 껐다. 견고한 실적을 내던 공장을 끄는 두려움은 당연히 컸다. 하지만 나 사장은 그보다 변화에 대한 확신이 더 컸다고 회상했다. 그는 "글로벌 경기에 따른 수익성 변동이 큰 석유화학 산업에서 벗어나 우리 힘으로 미래를 만드는 새로운 사업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 이후 새로운 사업 변화를 회사 전반의 기업문화로 적용시키기 위해 사명도 변경했다. SK종합화학에서 지금의 SK지오센트릭으로 바꿨다. 지오센트릭은 '지구'와 '중심'이라는 의미가 담겼다. 화학기업이 지구중심의 사업을 펼치겠다는 철학이 담기게 된 것이다.
나 사장은 "SK지오센트릭의 미래는 화학산업을 다시 재해석하는 것이었다"며 "플라스틱을 사용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고, 플라스틱 원료를 반세기 만들어 온 기업의 책무가 사업 구조를 혁신하는 출발점이 됐다"고 설명했다.
폐플라스틱에서 다시 찾은 화학산업의 '르네상스'
그렇게 SK지오센트릭은 플라스틱 재활용, 나아가 순환 경제 사업으로 방향을 잡았다. 지속가능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환경 규제가 강화되고 있는 전 세계적인 트렌드와도 딱 맞았다. 특히 기계적 재활용을 할 수 있는 깨끗한 플라스틱이 아닌, 소각이나 폐기할 수밖에 없는 폐플라스틱에 주목했다.
1972년 NCC처럼 새로운 50년의 역사를 시작할 '울산ARC'가 드디어 첫 삽을 떴다. 축구장 22개에 달하는 규모로 2025년까지 총 1조 8000억 원을 투자해 2025년 말 완공할 예정이다. 울산ARC는 화학적 재활용의 대표적인 세 가지 방식(고순도 PP 추출, 해중합, 열분해)을 모두 구축해 연간 32만 톤의 플라스틱 쓰레기를 재활용할 계획이다. 이는 국내에서 한 해 소각 또는 매립되는 폐플라스틱의 약 10% 수준이다.
울산ARC의 3가지 기술을 활용하면 비닐이나 복합재질 플라스틱, 오염된 소재, 유색 페트(PET)병 등 기존에 재활용이 어려웠던 플라스틱도 원료와 동등한 수준으로 재활용할 수 있다. 또 재활용 플라스틱의 높은 품질을 담보할 뿐 아니라 재활용 가능 횟수도 제한되지 않아 플라스틱을 사실상 무한하게 재활용하는 수준에 이를 수 있다고 SK지오센트릭은 설명했다.
공장 짓기도 전에 30% 선판매…亞·유럽으로 진출
재활용 플라스틱은 전 세계적으로 친환경 규제가 강화되면서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컨설팅기업 맥킨지는 2050년 재활용 플라스틱 시장 규모가 600조원에 이를 것으로 예측하기도 했다.
실제 SK지오센트릭은 공장을 짓기도 전에 글로벌 포장재 기업 암코를 비롯한 고객사들로부터 생산될 물량의 30%가량을 선판매 완료했다. 나경수 SK지오센트릭 사장은 “내년에서 내후년 사이까지는 70% 선판매 목표를 무난히 달성할 것”이라고 말했다.
공장이 완벽한 상업 가동을 하는 시점의 예상 매출은 7000억 원대로 예상했다. 영업이익은 2500억~3000억 원가량으로 추정했다. 나 사장은 “ARC에서 구현하는 재활용 기술은 수요 대비 공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시장”이라며 “고부가제품으로 취급되면서 2027~2028년 사이에 가격과 마진이 더 오를 것으로 예상한다”고 설명했다.
SK지오센트릭은 울산ARC를 시작으로 유럽과 아시아 등 글로벌 시장에도 진출할 계획이다. 나 사장은 “프랑스에서는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받는 등 공장 구축 논의가 구체적으로 진행 중”이라며 “파트너사들과 함께 한국에만 멈추지 않고 글로벌로 확대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