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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 “中 우한에 한때 1000명 韓 반도체 인력…고경력 베이비부머 활용 필요”

◆은퇴 러시 ‘베이비부머’ 인재 활용 방안

中 기업, 코로나19 이전 삼성·SK 퇴직 인력 대거 영입

1955~1974년 출생 고급인재 본격 은퇴, 진로 불확실

우리 대학·연구소·기업의 과학기술·공학 인력 사장 우려

인구절벽 속 경험 풍부 과학기술인 스타트업 재기용해야





2018년 중국 3대 반도체사가 우한시에 반도체 생산 공장을 동시에 건설하던 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인재 유출에 비상이 걸렸다. 중국 반도체사들이 현지 인력 확보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해 한국의 반도체 회사에서 퇴직한 50대 초중반 차장·부장급 인재 영입에 공을 들였기 때문이다. 이 회사들은 브로커를 통해 퇴직한 한국 반도체사 임직원들을 홍콩 등에서 접촉해 임금과 고용 조건에 관해 협상한 뒤 대거 채용했다. 한국의 고급 인력들은 반도체 공장 인근의 숙소에서 집단으로 머물며 중국 반도체 생산의 초기 기틀을 다져줬다. 이때 현지에서 일하다가 국내로 복귀한 A 씨는 “당시 중국어로 소속사와 이름을 붙이고 폐쇄회로(CC)TV와 안면 인식기가 설치된 보안 공간에서 24시간 감시를 받으면서 일했다”고 털어놓았다. 우리 반도체 기술자들이 중국 반도체사를 위해 노하우를 전수해주며 기술을 유출한 셈이다. 현장을 목격했던 B 씨는 지금은 많이 줄었지만 한때 1000명에 육박하는 우리 반도체 기술자들이 우한에서 근무했다고 전했다.






당시 우리 기술자 입장에서는 50대 중후반에 퇴직할 경우 재취업하기 쉽지 않았던 데다 회사에 대한 불만도 적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 반도체사들이 높은 연봉으로 유혹하면 쉽게 따라 나서고는 했다. 반도체 업계의 C 씨는 “HSMC 등 당시 우한에 공장을 짓던 반도체사들이 기술 경쟁에서 밀려 양산 체제에 들어가기 전에 문을 닫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면서 “현지 반도체 공장으로 옮겼다가 자리를 잃은 사람도 많았다”며 씁쓸해 했다. 그러면서 한국 기술자가 필요한 쪽에서 단체로 기술팀을 영입해 기술 유출에 대한 죄의식을 무력화시킨다고 했다.

권오경 전 한국공학한림원 회장은 “과학기술과 공학 분야의 우수 퇴직 인력은 국가의 소중한 자산”이라며 “이들을 인건비와 정년이라는 단순 잣대로 퇴직시키는 게 맞는지 신중히 판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임금체계 개편과 정년 조정을 통해 고경력 퇴직자들과 함께 일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술 인력의 중국 유출 증가는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 러시와도 관련돼 있다. 베이비붐 세대는 1955년부터 1974년까지의 출생자들을 일컫는다. 이들은 당시 매년 91만~108만 명까지 태어났다. 이제는 이들이 연쇄적으로 퇴직하면서 사망자를 제외한 매년 70만~90만 명의 베이비붐 세대가 고령층으로 편입되고 있다. 현재 정부가 노인으로 분류하는 65세 이상 인구는 올해 950만 명인데 2027년에는 1167만 명으로 늘어나게 된다. 2025년부터는 전체 인구 가운데 65세 이상의 비중이 20%를 넘는 초고령사회가 된다. 2040년에는 80세 이상 비중이 전체 인구의 31.5%까지 높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2022년, 2040년, 2070년 인구구조 비교. /통계청2022년, 2040년, 2070년 인구구조 비교. /통계청


과학기술과 공학 분야의 고경력 인력 활용은 국가 경쟁력 제고를 위한 핵심 과제가 됐다.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에 따르면 50세 이상 연구원 수는 2011년 4만 1932명(11.2%)에서 2020년 9만 3234명(16.7%)으로 크게 증가했다. 반면 국가 연구개발(R&D) 연구책임자의 경우 2021년 기준 45~49세 20.8%, 50~54세 18.3%, 55~59세 11.4%, 60~64세 6.8%, 65세 이상 1.9%로 50대 중반부터 급감하고 있다.

은퇴 직전인 지난해 초 한국에너지공대(KENTECH) 석좌교수로 자리를 옮긴 유룡 전 기초과학연구원(IBS) 나노물질 및 화학반응연구단장(KAIST 명예교수)은 “KAIST에서 특훈교수로서 70세까지 근무할 수 있었으나 61세부터 대학원생 지도에 제한을 받아 연구 역량에 상관없이 나이가 들면 연구를 지속하기 힘든 환경이었다”며 “결국 중국의 외국인 원사(院士)로 칭다오의 원사연구단지에 나가기로 예정돼 있었으나 다행히 켄텍에서 받아줘서 중국행을 취소했다”고 비화를 털어놓았다. 세계 최초로 3차원 그래핀 합성에 성공한 그는 “과거 나이든 교수나 연구자가 장유유서 관념이 있어 후배들에게 일을 미루는 경향이 있었으나 이런 문화가 서서히 변하고 있다”며 자신은 나이 들어 생애 최고의 연구 성과를 내고 있다고 소개했다. 우리도 우수 연구자의 경우 미국이나 영국처럼 정년 없이 연구를 계속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권오경 전 한국공학한림원 회장권오경 전 한국공학한림원 회장


유룡 한국에너지공대 석좌교수유룡 한국에너지공대 석좌교수



중국·일본·싱가포르·영국 등이 글로벌 우수 인력 유치와 이민 장려를 위해 적극 나서는 데 비해 우리는 고경력 인력의 조기 은퇴가 일상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실제 기업에서는 50대 엔지니어들의 퇴직 러시가 일어나고 대학에서는 교수 정년이 65세이지만 60대만 되면 연구실 축소에 들어간다. 정부 출연 연구원의 경우 은퇴(61세) 후에도 우수 연구자의 경우 정규직 연구원 정원의 10% 이내에서 65세까지 우수 연구원으로 위촉될 수 있으나 실제로는 5%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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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는 교수가 테뉴어(종신 보장)를 받을 경우 외부에서 연구 자금만 가져올 수 있으면 나이 제한을 받지 않는다. 올해 예산이 약 60조 원이나 되는 미국 국립보건원(NIH)도 우수 연구자로서 테뉴어를 받으면 해임되지 않는다. 유럽연합(EU) 회원국에서는 고경력 우수 연구자들이 최장 5년간 250만 유로(약 35억 원)를 지원받을 수 있다. 중국과학원은 ‘원사’ 제도를 운영해 연구 경력이 뛰어난 과학 분야 원로 석학들에게 정년 없이 소속 기관에서 계속 연구할 수 있도록 연구비를 지원한다. 2021년까지 누적 원사 숫자는 총 860명으로 이 가운데 외국 국적의 원사는 129명이었다. 이들은 중국 과학기술 전략 수립과 핵심 과학자 육성, 해외 우수 과학자 유치 등에서 큰 역할을 한다.

인공지능(AI)·반도체 전문가인 김정호 KAIST·삼성전자 산학협력센터장은 “제자들이 30명 이상 실리콘밸리 빅테크 기업에서 일할 정도로 탄탄하게 자리 잡은 연구실이지만 제가 60대 초반이 되면서 대학원생도 올해 석사 과정 한 명만 받을 정도로 규모를 줄이기 시작했다”며 “대학에서 테뉴어(65세 정년 보장) 제도를 없애는 대신 능력 있는 교수는 정년 이후에도 연구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강대임 전 한국표준과학연구원장은 “우수한 은퇴 과학자가 정년 후에도 연구할 수 있는 문화와 생태계가 필요하다”며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산학연(産學硏) 간 연계를 강화해 고경력 과학기술인 활용 플랫폼을 구축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은퇴를 1~3년 앞둔 고경력 과학기술인의 경우 중소·벤처·스타트업과의 공동 연구와 자문, 전문 분야 연구, 사회 공헌을 확대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다.

KAIST·삼성전자 산학협력센터장(KAIST 전기전자공학과 교수)KAIST·삼성전자 산학협력센터장(KAIST 전기전자공학과 교수)


강대임 전 한국표준과학연구원장강대임 전 한국표준과학연구원장


현재 한국연구재단이나 각 부처별로 다양한 고경력 과학기술인 활용 사업을 추진 중이지만 미미한 실정이다. 고경력 과학기술인 활용 극대화 방안을 연구한 KISTEP의 김인자 박사는 “고경력 과학기술인은 은퇴 전부터 연구 인력 확보나 정부 R&D 수주 애로 등으로 선도국에 비해 일찍 연구 단절 현상을 겪으며 전문성이 사장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국부 유출 방지와 연구 단절 방지, 중소·벤처·스타트업의 기술 경쟁력 강화를 위해 지속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김인자 KISTEP 연구위원김인자 KISTEP 연구위원


이와 함께 세계 최저 출산율 속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 러시는 사회적 부담 증가, 노동력 부족, 연기금 고갈 등 복합적인 충격을 야기한다는 점에서 사회적 대비가 필요하다. 우리나라의 합계출산율은 지난해 0.778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하위였다. 합계출산율이 1명 미만인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저출산으로 비상등이 켜진 일본조차도 지난해 합계출산율이 1.26명이었다. 프랑스는 1.8명으로 우리의 2배가 넘는다. 한국은 2020년 사망자가 출생자보다 많은 ‘데드크로스’를 지나 인구가 2021년 5만 7000여 명 감소한 데 이어 지난해에는 12만 3000명 이상 줄었다. 우리의 인구 감소 속도가 매우 가파르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하다.

생산가능인구(15~64세 인구)가 급감하면서 그만큼 신규 이공계 인력 공급도 줄어들게 된다. 기술 패권주의 심화, 구조적 저성장, 인구 감소 추세에서 잠재성장률 저하라는 악순환에 처하게 된다. 현재 우리 기술 수준은 2021년 기준으로 최고 보유국 대비 80% 정도로 37억 7000만 달러의 기술 무역수지 적자를 보이고 있다. 생산가능인구의 감소는 세대 갈등도 증폭시키게 된다. 현재 생산가능인구 100명이 25명의 고령 인구를 부양하는데 10년 뒤에는 50명 가까이 부양해야 하는 처지가 된다. 노인 빈곤율도 37.6%(2021년)로 OECD 평균(14.9%·2020년)의 2배를 훌쩍 넘는다.

마강래 중앙대 도시계획부동산학과 교수마강래 중앙대 도시계획부동산학과 교수


한국은행 경제연구원이 올해 5월 말 펴낸 ‘노동 공급의 추세적 변화에 대한 평가 및 전망’ 보고서에 따르면 정년 연장, 이민정책, 여성 인력 활용 등을 모두 동원하더라도 노동 부족을 메꾸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마강래 중앙대 도시계획부동산학과 교수는 “베이비부머가 절반 이상 지방으로 이주할 의향이 있는 상황에서 정부와 지자체가 이들과 지방 중소기업을 연결해 주 3일 정도 일하게 하는 방식으로 지원하면 효과적일 것”이라고 조언했다. 이를 위해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20가구 내외의 단지형 임대주택을 제공하고 공동 텃밭을 가꾸면서 바비큐 파티도 함께할 수 있게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권 전 회장은 “‘잃어버린 30년’을 겪은 일본보다 우리의 경제성장률이 더 떨어질 수 있는 상황을 맞았다”며 “베이비부머를 얼마나 잘 활용하느냐가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시대가 됐다”고 말했다.


고광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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