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1일 이동관 방송통신위원장의 사의를 당일 곧바로 수용한 것은 거대 야당의 탄핵 덫에 걸려 방송통신위원회가 장기간 수장 공백 사태에 처하는 것을 막기 위한 고육책으로 보인다. 방송 개혁을 기치로 내걸었던 윤 대통령으로서는 해당 정책 과제를 주도하는 정부기관이 제대로 된 의사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식물화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대통령실은 이날 오후 언론 공지문을 통해 윤 대통령이 이 위원장의 면직안을 재가했다고 밝혔다. 대통령실 관계자에 따르면 이 위원장은 전날 윤 대통령에게 직접 자진 사퇴 의사를 전달했고 윤 대통령은 이를 수용했다.
현재 방통위에는 현직 위원이 이 위원장과 이상인 부위원장 2명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탄핵안이 가결됐다면 이 부위원장 1명만 남게 되는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관련법에 방통위 개의 요구 정족수가 ‘위원장 단독’ 혹은 ‘2인 이상 위원의 요구가 있는 경우’로 규정돼 있어 이 부위원장 혼자서는 방통위를 열 수 없다. 탄핵 피청구인은 직에서 물러날 수 없어 새 위원장을 임명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결국 탄핵안이 통과되면 통상 최소 6개월이 소요되는 탄핵 심사 내내 방통위는 제대로 기능할 수 없게 되는 셈이다. 윤 대통령은 이 같은 최악의 상황만은 피해야 했기에 불가피하게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이 위원장의 사표를 수리한 것으로 보인다.
이 위원장으로선 자신을 둘러싼 야권의 공격이 내년도 예산안 심사와 국정과제 추진에 부담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점도 무겁게 받아들였다. 그 결과 지난 11월 30일 윤 대통령에게 직접 사의를 표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튿날 공개적으로 사퇴의 뜻을 밝힌 것이다. 그는 이날 과천정부청사에서 기자들을 만나 “제가 사임하는 것은 거야의 압력에 떠밀려서가 아니다”라며 “오직 국가와 인사권자인 대통령을 위한 충정”이라고 설명했다.
이 위원장이 물러나면서 윤 대통령은 후임 방통위원장을 빠르게 지목하는 방식으로 방통위를 정상 운영할 것으로 보인다. 후임으로는 정치권 안팎에서 김은혜 전 대통령실 홍보수석, 김장겸 전 MBC 사장, 이진숙 전 대전MBC 사장이 거론되고 있다. 다만 김 수석은 내년도 총선 출마를 준비하고 있어 인선에 변수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민주당은 이 위원장의 사퇴를 ‘정치적 꼼수’로 규정하며 윤석열 정부의 방송 개혁 드라이브가 유지되는 한 후임으로 지명될 방통위원장도 탄핵하겠다고 경고했다. 홍익표 민주당 원내대표는 “정부는 제대로 된 방통위원장을 보내야 할 것”이라며 “이 위원장과 같은 방식으로 하는 방통위원장이 임명된다면 좌시하지 않겠다. ‘제2의, 제3의 이동관’도 탄핵시킬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편 이날 이 위원장의 자진 사퇴로 두 번 연속 이 위원장 탄핵에 실패하면서 민주당 지도부가 전략을 안일하게 세운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이 위원장이 자진 사퇴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정치권 안팎에서 거론됐음에도 정작 민주당 지도부가 이를 대비하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민주당 원내 관계자는 “자진 사퇴 가능성도 언급됐지만 실제로 실행할 줄 몰랐다”고 말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며 자진 사퇴가 민주당의 탄핵 시나리오에 없었음을 인정했다.
민주당은 지난달 9일에도 이 위원장의 탄핵을 시도했지만 국민의힘이 노란봉투법·방송3법 저지를 위한 필리버스터를 전격 철회하면서 고배를 마신 바 있다. 탄핵안은 본회의 보고 시점으로부터 24시간 이후 72시간 이내 처리해야 하는데 국민의힘이 필리버스터를 포기하면서 탄핵안을 표결할 본회의 자체가 사라졌다. 당시에도 민주당 지도부는 국민의힘의 대응을 사전에 예측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