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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한류' 원조…이응노 미공개작을 만나다

[대전 이응노미술관 특별전]

1930년대부터 유럽활동시기까지

3개 전시실서 주요작 60여점 선봬

프랑스 퐁피두 센터 소장 4점 등

30여점은 국내에 최초 공개 주목

이응노 ‘군상’. 사진 제공=이응노미술관이응노 ‘군상’. 사진 제공=이응노미술관




먹으로 그린 듯한 검은 형체의 수많은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고 있다. 무엇을 향한 절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성난 군중의 모습이다. 이 작품은 고암 이응노(1904∼1989) 화백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그린 ‘군상’이다.



그림은 보는 이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한국인들은 이 그림을 보고 1980년대를 뜨겁게 달군 ‘광주민주화운동’을 생각한다. 하지만 프랑스인들은 1960년대 학생과 근로자들이 연합해 벌인 시위 ‘68혁명’을 떠올린다.

한국 근대 작가가 그린 작품에 느닷없이 프랑스인들의 해석을 덧대는 이유는 아마도 그의 작품활동이 오랜 시간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에서 이뤄졌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또 한국인들의 해석을 더하는 이유는 그가 오랜 유럽 생활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동아시아 화풍의 전통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누가 감상하더라도 자신만의 해석이 가능한 융합 추상화의 진면모를 보여준다.

60년전 유럽 미술계에서 ‘미술 한류’를 일으켰을 정도로 주목받은 이응노 화백의 탄생 120주년을 기념한 전시가 대전 이응노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이응노는 ‘군상’으로 워낙 국내에서 잘 알려져 있지만 국립현대미술관, 프랑스 퐁피두센터, 체르누스키 파리시립아시아미술관 등 세계 곳곳의 미술관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어 국내에 공개되지 않은 작품이 여전히 많다.

이응노 미술관은 1977년 프랑스 월간지가 그의 작품을 소개할 당시 글의 제목인 ‘동쪽에서 부는 바람, 서쪽에서 부는 바람’을 이번 전시의 제목으로 정하고, 그의 작품을 시대별로 구분해 국내 제작 작품과 해외 제작 작품, 미공개 작품을 두루 감상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 주요 미술관과 컬렉터들이 소장한 60여 점이 한데 모인 대규모 특별전으로 이 중 30여 점은 국내에 한 번도 공개된 바 없는 작품이다.



작가는 평생 2만여 점 이상의 작품을 남겼을 정도로 왕성하게 활동했다. 하지만 작품이 일관된 특성을 보이지는 않는다. 작가 스스로도 ‘내 작품은 10년 마다 변화했다’고 말할 만큼 특정한 화풍에 집착하지 않은 탓이다. 그럼에도 작가의 세계를 보여줄 수 있는 큰 축은 있다. 이번 전시는 이응노의 작품을 시기별로 나눠 전시하고 그 안에 미공개작을 공개해 예술활동을 위해 평생을 바친 작가의 진정한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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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노 ‘구성(1964)’. 사진 제공=이응노미술관이응노 ‘구성(1964)’. 사진 제공=이응노미술관


전시는 프랑스 퐁피두센터가 소장한 4점의 미공개작을 소개하고 있다. 작가는 54세의 나이에 새로운 도전을 위해 유럽으로 이주했다. 종이로 싼 캔버스 위에 종이를 찢어서 붙인 ‘무제(1960)’와 캔버스에 모래를 붙여 마모된 돌의 질감을 주면서 그 위에 전서체와 예서체를 결합해 그린 ‘구성(1963)’ 등이 당시에 제작된 작품이다.

1989년 일본 도쿄와 오사카에서 열린 이응노 추모전에 전시된 1964년작 ‘구성’도 한국에 처음으로 공개된 작품으로 1전시실에서 볼 수 있다. 특히 이는 서예가이기도 했던 작가가 흰 바탕에 검은색 먹으로 글씨를 쓰는 서예의 방식을 뒤집어 검은 바탕에 글씨에 해당하는 부분을 희게 남겨 제작한 도전적이고 실험적인 작품이다.

1970년대에는 또 다른 ‘구성’ 작품이 등장한다. 빨강, 노랑 등 원색으로 이뤄진 기이한 형상은 사실은 ‘좋을 호(好)’를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처럼 작가의 작품은 당대 유럽의 유행을 따르면서도 동양의 전통이 반영돼 당대 유럽인들로 하여금 신비로움을 느끼게 했다.

이응노 ‘대죽’. 사진 제공=이응노미술관이응노 ‘대죽’. 사진 제공=이응노미술관


2전시실에서는 유럽으로 이주한 후 작가의 작품 세계를 감상할 수 있다. 작가는 유럽으로 이주하기 전 산수화를 즐겨 그렸는데 3전시실에서는 당시의 작품이 걸린다. 특히 3전시실에 걸린 ‘대죽’은 작가의 초기 대나무 그림의 경향을 보여주는 귀한 작품이다. 이 작품의 대나무는 화면 한가운데를 수직으로 관통하는 대범함을 보여주면서 일제강점기인 1932년 조선총독부가 주관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무감사 입선(이전 전람회에서 상을 받은 작가가 이듬해 심사 없이 전시할 수 있게 한 제도)했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의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작품은 ‘파리사람(1976)’이다. 두꺼운 외투와 모자를 쓴 사람이 푸들처럼 보이는 개와 산책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유럽이나 미국에서 볼 수 있는 1970년대 남성의 모습이지만, 그림을 그린 재료는 먹이다. 작가는 프랑스에서 유학하며 유럽의 미술 양식을 받아들이고 이를 다시 동아시아의 전통과 어우러지게 한 진정한 융합 예술인이었다. 전시는 3월 3일까지.

이응노 ‘파리사람’. 사진 제공=이응노미술관이응노 ‘파리사람’. 사진 제공=이응노미술관


서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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