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 정부가 공언했던 실거주 의무 완화가 물거품이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야당에서는 전세사기피해위원회처럼 정부가 위원회를 구성해 실수요자와 투기자를 가리자는 입장이지만, 정부와 여당에서는 피해 사실 증명과 정당성 판정이 어렵다는 이유로 ‘5년 이내 실거주 요건 충족’ 등 규제를 완화한 법안 개정을 요구하고 있다.
4일 국회 등에 따르면 오는 6일 열리는 국토법안심사소위원회의 심사 대상에서 실거주 의무 완화하는 내용이 담긴 주택법 개정안이 빠졌다. 당초 이번 소위가 21대 국회의 마지막 국토위 법안심사소위였으나 상정된 안건이 94건으로 많은 만큼 이달 중 한 번 더 열릴 가능성이 있다.
지난 11월 두 차례 열린 소위에서도 실거주 의무 완화를 놓고 여야간 의견 대립이 첨예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실거주 의무 전면 폐지가 어렵다면 처음에는 전세를 주더라도 차후에 실거주 의무를 이행할 수 있도록 '불연속적 거주'라도 완화해주자는 여당과, 기존 청약자들과의 형평성 문제가 있어 법 개정은 어렵다는 야당의 이견이 큰 상황이다. 야당은 대신 '계약 당시와 입주 시점 금리 차이가 통상적인 예측 범위를 넘었을 경우' 등 일반적인 상황을 담은 내용을 시행령에 담고, 퇴직·파산 등 일반화하기 어려운 사정의 경우 전세사기피해위원회처럼 정부가 전문가를 구성해 판정하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정부는 이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이다. 명백한 피해 사실이 존재하고 증명 가능한 전세사기와 달리, 실거주가 어려운 사유에 대해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국토부 관계자는 "당장 실거주 할 수 없는 상황은 저마다 각인각색의 사유가 있는데 모두가 납득할 수 있도록 정당성 여부를 가릴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내년 총선 때까지 시간이 좀 남은 만큼 지속적으로 국회와 협의를 이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원희룡 국토부 장관도 "투기 세력에 대한 (야당의)걱정을 이해는 하지만 당장 거주가 어려운 상황에서 분양받은 아파트를 포기하라고 강요하는 것도 지나치다고 생각한다"며 "실거주 조건을 달더라도 현재 오도가도 못하는 실수요자들을 보호할 수 있는 입법이 마련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 대책을 믿고 집을 계약한 수분양자들은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올초 정부는 1·3 부동산 대책을 통해 수도권 분양가 상한제 아파트의 실거주 의무를 폐지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실거주 의무가 부과된 경우에도 개정 법률을 소급해 적용하겠다고 덧붙였다.
당시 미분양이 쌓이던 신규 분양 단지들은 이같은 내용을 내세우며 실수요자들의 청약을 유도했다. 지난해 12월 27일 1순위 청약에서 평균 0.96대 1의 경쟁률로 미분양된 '철산 자이 더 헤리티지'는 실거주 의무와 자금조달계획서 증빙서류 제출 폐지 등 부동산 정책이 변경됐다며 홍보했다. 인근에 위치한 '광명 호반써밋 그랜드에비뉴' 등 타 단지들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미분양 주택을 계약한 한 수분양자는 "모델하우스에 방문했는데 실거주 의무가 다 풀린다고 현수막이 걸려 있었고 상담자들도 정부 자료를 보여주며 걱정 말라고 했다"며 "당장 내년 입주인데 잔금을 어떻게 마련할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하다"고 토로했다. 또다른 계약자 역시 "자녀 학업이 끝난 뒤 노후를 생각하며 미분양분을 계약했는데 정부와 건설사에게 놀아난 것 같다"며 울분을 터뜨렸다.
광명시는 1·3 부동산 대책을 통해 규제지역에서 해제됐지만, 분양가 산정 당시 분양가상한제 규제를 받은 단지는 여전히 실거주 의무가 남아 있다. 국토부에 따르면 2011년 2월 이후 입주자 모집 승인을 신청해 실거주 의무 규제를 받는 아파트는 전국 66개 단지, 4만 3786가구에 달한다.
한편 6일 국토위원회 법소위에는 94건의 안건이 오를 예정이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의 자본확충과 보증배수를 높이는 안건과 상가 쪼개기 방지를 담은 도시정비법 개정안, 리츠 법인세를 감면하는 내용의 부동산 투자회사법 개정안, 전세사기 피해자 요건 중 보증금 기준을 5억 원 이하로 상향하고 임대차계약 종료 후 보증금을 3개월 이상 반환하지 않는 경우 사기 의도가 있다고 판단하는 내용 등이 담긴 전세사기 피해자 지원 및 주거안정에 관한 특별법 일부개정안 등이 논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