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가가 중동 산유국들의 감산에도 불구하고 급락세를 멈추지 않고 있다. 중국의 경기 둔화 우려가 짙어지는 데다 미국의 원유 생산량 또한 기록적으로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뿐 아니라 브라질·베네수엘라·캐나다 등에서도 원유 생산이 늘면서 사우디아라비아가 주도해온 에너지 시장의 역학 관계가 변화하고 있다는 진단도 나온다.
7일(현지시간) 뉴욕상품거래소에서 북해 브렌트유 선물은 전 거래일 대비 25센트(0.03%) 하락한 배럴당 74.05달러로 마감했다. 미국 서부 텍사스원유(WTI) 선물은 4센트(0.06%) 하락한 69.34달러를 기록했다. 두 유종 모두 6월 말 이후 최저를 나타냈다.
국제유가는 수요와 공급 측면에서도 모두 하방 요인이 커지고 있다. 미 에너지정보청(EIA)에 따르면 지난주 미국의 휘발유 재고는 직전 주 대비 540만 배럴 증가했는데 이는 시장 예상보다 증가 폭이 4배 이상 큰 것이다. 존 킬더프 어게인캐피털 LLC 파트너는 “긴 추수감사절 연휴 기간이 휘발유 성수기는 아니었지만, 수요가 부진했다”고 밝혔다.
중국발 경기 둔화 우려 역시 확산하고 있다. 중국 해관총서(관세청) 발표에 따르면 중국의 11월 수입액은 전년 동기 대비 0.6% 하락했다.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9월까지 계속해서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하다가 올 10월 1년 만에 상승세로 돌아섰으나 한 달 만에 다시 하락 반전했다. 경기 회복이 지연되면서 내수 소비가 급격히 얼어붙는 분위기다.
앞서 국제 신용평가기관 무디스는 5일 중국의 국가 신용등급 전망을 종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하향했다. 동시에 2024년과 2025년 경제성장률은 4% 아래로 떨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이어 6일에는 홍콩과 마카오, 중국 주요 기업과 은행의 신용등급 전망 역시 ‘부정적’으로 낮췄다.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중국에서 공식 통계에 잡히지 않는 숨겨진 부채 규모가 약 7조~11조 달러(약 9100조~1경 4400조 원)로 추산된다고 주장했다. 특히 이 중 4000억 달러에서 8000억 달러 이상은 디폴트(채무불이행) 위험에 노출돼 있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부채 규모가 재정을 악화시켜 경제성장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공급 측면에서는 미국의 원유 생산량이 기록적으로 증가하며 중동 산유국들의 감산 효과를 상쇄하고 있다. 뉴욕타임스(NYT) 등에 따르면 올 10월 말 기준 미국은 러시아나 사우디아라비아보다 많은 하루 1320만 배럴의 원유를 생산하고 있다. 이는 2022년보다 80만 배럴 많은 것이며 내년에는 하루 50만 배럴이 더 생산될 것으로 점쳐진다.
미국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국제유가가 급등하자 미국 내 유정 개발을 재가동했는데 여기에서 올해부터 본격적인 시추가 이뤄지고 있다고 NYT는 전했다. 내년 대선을 앞둔 조 바이든 행정부가 여론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기름 값을 안정적으로 낮추기 위해 미 에너지 기업들을 독려하는 것도 원유 생산 증가의 원인으로 분석된다. 미국은 현재 하루 400만 배럴 이상을 수출하고 있는데 이는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 중 사우디아라비아를 제외하면 가장 많은 물량이다.
이처럼 국제유가가 급락하는 가운데 사우디아라비아와 러시아 등 산유국들의 다음 행보가 주목된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러시아와 알제리 담당 관계자들이 잇따라 추가 감산 가능성을 언급했다”며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원유 시장에 대해 협의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