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품을 중단하겠다는 공급 업체의 압박으로 합의금을 주고 이의를 제기하지 않기로 약속했더라도 이는 강박에 의한 의사표시로 유효하지 않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17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1부(주심 노태악 대법관)는 지난달 30일 A 사가 B 사의 소송수계인(회생관리인)을 상대로 제기한 부당이득금 반환 소송 상고심에서 원심의 각하 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1심 법원인 수원지법 안산지원에 돌려보냈다.
자동차 부품을 제조·납품하는 1차 협력업체인 A 사는 2차 협력업체인 B 사에 부품 생산에 필요한 금형(틀)을 빌려주고 부품을 납품받고 있었는데, 2018년 9월부터 부품의 단가 조정, 품질 관리 등 문제로 분쟁을 겪었다. A 사는 이에 공급계약을 해지하겠다고 통보하고 빌려준 금형의 반환을 요구했다. 그러자 B 사는 정산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반환을 거부했다. 갈등이 계속되면 부품 공급을 중단하겠다고도 경고했다.
A 사가 금형을 반환하라며 가처분 신청을 내자 B 사는 실제로 부품 공급을 중단했다. A 사는 이에 가처분 신청을 취하하고 '어떠한 경우에도 법률적인 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합의서를 써줬다. 하지만 B 사는 2019년 1월 A사에 정산금과 투자 비용, 손실보상금 명목으로 거액을 요구하면서 재차 부품 공급을 지연했다. 부품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한 A 사는 결국 B사에 24억원을 지급하고 금형을 반환받기로 합의했다. 아울러 B사와 그 임직원을 상대로 어떠한 민·형사상 소송도 제기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같은 해 6월 A 사는 B사를 상대로 부당하게 취득한 돈을 돌려달라며 소송을 제기했다. 1·2심 법원은 A사의 청구를 각하했다. B사와 맺은 합의가 적법하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다만 대법원은 반면 "(부제소합의는) 위법한 해악의 고지로 말미암은 강박에 의한 의사표시에 해당한다고 볼 여지가 크다"며 판단을 뒤집었다. 민법 110조 1항은 '사기나 강박에 의한 의사표시는 취소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대법원은 "B사 측이 부품 공급을 지연하거나 중단했고 그로 인해 A사가 정산금 세부 내역을 검토하지 못한 채 이 사건 합의를 통해 B사에 합의금을 지급하고 가처분이나 민·형사 소송 등 정당한 권리 행사를 포기하며 막대한 손해배상액까지 지급하기로 약정했다"고 지적했다. 이에 "원심과 1심 판단에는 강박에 의한 의사표시에 대한 법리를 오해해 필요한 심리를 다하지 않은 잘못이 있다"며 원심의 각하 판결을 파기하고 민사소송법 418조에 따라 1심 법원에 돌려보냈다.
한편 검찰은 A 사를 겁박한 B 사 대표를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위반(공갈) 혐의로 기소했다. 그는 1심에서 무죄를 받았으나 2 심에서 유죄로 뒤집혀 실형을 선고받았고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