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쾌한 블랙 코미디로 117분이 짧게 느껴진다. 감독의 장편영화 데뷔작임에도 지난해 토론토 영화제 관객상 수상이 납득할 만하다. 코드 제퍼슨 감독의 ‘아메리칸 픽션’은 출판업계의 흑인 대표성을 풍자한 퍼시벌 에버렛의 2001년 소설 ‘이레이저’를 원작으로 한 영화다. 보스턴 출신의 흑인 지식층인 ‘몽크’라 불리는 소설가 텔로니어스 엘리슨(제프리 라이트)은 40년 동안 환멸하던 게토 소설을 쓰면서 단숨에 스타 작가덤에 오른다. 그렇게 만들어진 허구의 세계에는 위선과 연민, 가족 역학 관계가 존재한다.
풍자에만 집중하지 않고 그보다 훨씬 많은 이야기를 담고 싶다는 감독의 의도가 두 축을 이룬다. 흑인 문화가 상품화되고 축소되는 것에 대한 완벽한 풍자이자 비판이 하나의 큰 축을 이루고 나머지는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한 가족이 함께 모이는 이야기다. 지난달 버추얼 간담회에서 제퍼슨 감독은 “인생은 희극도 비극도 아니다. 희극적이지 않으면서도 풍자적인 영화를 원했다. 코미디의 무게에 짓눌려 삶의 무게를 희석시키는 것도 원치 않았다”고 밝혔다.
제퍼슨 감독은 제프리 라이트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시나리오를 썼다. ‘엔젤스 인 아메리카’로 토니상과 에미상을 수상한 배우이자 웨스 앤더슨 감독의 단축번호에 저장돼 있다는 바로 그 배우다. 제프리 라이트는 “예민한 주제를 날카롭지 않게 끌어내는 대화가 와닿았고 언어, 상황, 인종에 대한 역사를 유려하게 표현하는 글쓰기 방식이 좋았다”고 했다. 이어 그는 “몽크라는 남자의 자화상과 사랑에 대한 정의, 특히 각색된 시나리오에 그려진 가족이 개인적으로 뜻깊었다. 사회적 논평 측면과 관련된 질문에 답하려 하지는 않지만 가족 역학이 멋진 대조를 이루며 몽크의 삶 속 부조리에 절대적 영향을 미쳤음을 드러내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겉만 보면 몽크는 흑인 민권운동 지도자 W.E.B. 두 보이스가 쓴 에세이 ‘유능한 10%’(The Talented Tenth)에 해당되는 지식인이다. 대학 교육을 받고 책을 쓰고 사회 변화에 직접 관여하면서 흑인 사회의 리더가 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한 상위 10%의 엘리트 흑인. 문화적으로 용인된 방식으로만 행동하는 체면의 정치를 통해 더 나은 흑인 사회를 만들고 싶어하는 지식인. 그러나 제퍼슨 감독은 베스트셀러 작가 신타라 골든(이사 래)을 등장시켜 이런 영웅은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신타라가 악당 역할을 하는 것도 아니다. 신타라는 몽크가 자기혐오에 빠져 있을지도 모르고, 흑인성에 대한 내적 갈등을 겪고 있을지 모른다고 자각하게 만드는 지적을 할 뿐이다.
제퍼슨 감독에게 문학적 영웅은 제임스 볼드윈이다. 미국 현대문학의 한 축이자 민권 운동가인 제임스 볼드윈의 ‘조반니의 방’을 가장 좋아하는 작품으로 꼽았다. 진정한 휴머니즘이 담겨 있어서 매우 현실적으로 와닿았고 우리 모두는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열망에 빠지게 해서다. 제퍼슨 감독은 “기자 생활을 할 때는 매주 누군가가 찾아와 플로리다주 흑인소년 트레이본 마틴 총격 피살 사건이나 마이크 브라운 사망을 들먹이며 비무장 흑인 십대가 경찰에 의해 피살되는 사건에 대해 글을 쓰고 싶냐고 묻는 일이 잦았다. 마치 매일 마주해야 하는 불행의 회전문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토로했다. 또, TV에서 일하기 시작했을 때는 마침내 날개를 펴고 다양한 상황에 처한 흑인에 대해 글을 쓰고 흑인 삶의 깊이와 넓이, 복잡성과 뉘앙스를 탐구할 수 있을 거라 잔뜩 기대에 부풀었다고 했다. 그는 “무엇이든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흑인 십대가 경찰에게 피살되는 이야기, 마약 딜러, 노예에 관한 영화 제안이 들어왔다”며 “사람들이 생각하는 흑인의 삶에는 여전히 경직된 한계가 있고, 흑인이 해야 할 이야기에 대해서도 경직된 한계가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 소설의 영화화를 추진했다”고 밝혔다.
아마존 MGM 스튜디오가 제작한 ‘아메리칸 픽션’은 아마존 프라임을 통해 공개될 예정이다./하은선 미주한국일보 편집위원·골든글로브협회(GGA) 정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