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투자도 못 받아 뉴욕에서 ‘거지’같이 살고 있을 때입니다. 허름한 식당에서 지루하다는 표정이 역력한 벤처캐피탈(VC) 사람 2명 앉혀놓고 스타트업 12곳이 사업 소개에 나섰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제 회사에 관심갖게 할 방법이 없더군요. 식당 테이블 위에 뛰쳐 올라 소리 질러가며 회사를 소개했습니다. 투자자가 부끄러워서 얼굴도 못 들더군요. 그 VC로부터 700만 달러 시리즈A(스타트업 첫 본격 투자)를 받았습니다.”
CES 2024가 마무리된 12일(현지 시간)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열린 한인 스타트업 연례 컨퍼런스 ‘82스타트업 서밋’. 단상에 오른 정세주 눔(Noom) 의장은 마치 종교 지도자 같은 열기로 좌중을 사로잡았다. 정 의장이 2008년 창업한 눔은 미국 최고의 헬스케어 스타트업으로 꼽힌다. 2021년 기준 기업가치가 37억 달러로 상장시 ‘데카콘(100억 달러)’ 진입이 확실시된다.
정 의장의 강연을 지켜보던 홍범식 ㈜LG 경영전략부문장(사장)은 “이미 굉장한 성공을 거둔 정 의장의 에너지는 볼 때마다 대단하다”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홍 사장은 CES2024 대신 JP모건 헬스케어 컨퍼런스 참관을 위해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한 차에 82스타트업 서밋을 찾았다고 한다. “스타트업들의 열정에 큰 영감을 받는다”는 홍 사장은 특별한 세션 참석 일정이 없었음에도 홀로 행사를 찾아 끝까지 지켜본 후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홍 사장은 베인&컴퍼니 아시아 정보통신부문 대표와 한국지사 대표직을 거쳐 2019년 LG그룹에 합류한 LG그룹 투자전략 브레인이다. 세계 3위 자동차 부품 업체인 마그나인터내셔널과 합작법인 설립 등이 그의 손을 거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날 행사에서는 윤풍영 SK C&C 대표가 ‘기조연설’을 맡았다. 윤 대표는 SK하이닉스 인수전에 참여하고 SK스퀘어 최고투자책임자(CIO) 등을 거친 SK그룹 내 투자전문가다. 윤 대표는 SK온 배터리 공장 관련 출장으로 애틀랜타를 찾았다 CES 2024를 하루 참관하고 실리콘밸리를 향했다고 한다.
윤 대표는 SK와 같은 기업간거래(B2B) 대기업이 지닌 스타트업 투자 관점에 대해 소개했다. “한국 대기업은 미래 혁신을 이끄는 스타트업과 협력이 부족했고 조직 변화가 잦아 투자와 협력이 일관되지 못했다”는 자기반성으로 강연을 시작한 윤 대표는 “유동성 시대 종말로 대기업 투자 초점이 B2B로 옮겨가고 있다”며 “B2B에서는 기업이 ‘고객사’를 찾아주고 스타트업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완전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완충재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끝으로 “스타트업들이 미래의 SAP가 되고 SK는 IT전략컨설팅사 액센츄어 같은 역할을 맡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4대 기업 투자책임자들이 바쁜 일정 속에서도 찾은 82스타트업 서밋은 2018년 단 9명의 모임으로 시작해 올해는 1000여 명이 참가한 미주 최대 한인 스타트업 행사다. 이날 행사에는 눔을 비롯해 야놀자·업스테이지·몰로코 등 대형 실리콘밸리 K스타트업 창업자·대표들이 대거 참석했다. 이진형 스탠퍼드대 교수도 세션에 참가했고, 뉴욕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는 가수 이소은이 MC를 맡았다.
실리콘밸리 한인 1세대인 이종문 엠벡스벤처그룹 회장 또한 96세 고령에도 자리를 지켰다. 이 회장은 고 이종근 종근당 창업주의 동생으로 50대에 도미해 '다이아몬드멀티미디어시스템'을 설립, 1990년대 상장시켜 거부를 일군 벤처계 ‘전설’이다. 이 회장은 거액의 기부 활동으로 미국 내 한인사회에서 존경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