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한국 증시의 저평가 해소 방안으로 공언한 ‘한국판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의 성공을 위해서는 정교한 거시경제정책이 병행 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주주가치 제고와 공정한 시장질서 확립 등 현재 제시된 밸류업 대책이 미시적 접근에 머물러 경제성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큰 틀의 정책 설계가 부족하든 지적에서다. 특히 정부가 밸류업 성공 사례로 꼽는 일본의 경우도 견조한 경제성장이 경제구조를 지탱해주며 기업성장을 견인하는 뒷심으로 작용했다.
이런 가운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5일 한국의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2.2%로 3개월 만에 0.1%포인트 낮췄다. 중동 지역 불안과 내수 부진이 이유다. 반면 글로벌 예상치는 2.7%에서 2.9%로 올려 잡았다. 강한 고용과 소비를 무기로 지난해 2.5% 성장해 한국(1.4%)을 크게 앞섰던 미국은 올해 2.1% 성장할 것으로 예측됐다. 경제 규모가 한국보다 16배가량 큰 데도 성장 전망치가 엇비슷하다. 미 애틀랜타 연방준비은행은 현재 1분기 미국 경제성장률을 연율 기준 4.2%로 점치고 있다.
탄탄한 펀더멘털이 주가 상승 기반
탄탄한 펀더멘털은 주가 상승의 기반이다. 미국 증시를 가장 잘 반영하는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은 최근 1년간 20.23% 급등했다. 같은 기간 코스피지수는 0.58% 내렸다. 김우철 서울시립대 세무학과 교수는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원인은 (낮은) 경제성장에 있으며 핵심 대책도 성장에 달렸다”고 설명했다.
정부가 한국 증시의 저평가 해소 방안으로 ‘한국판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지만 성장률 제고와 건전재정 같은 거시적 요인은 뺀 채 기술적·단기적 대안 마련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근본적인 대책 없이는 짧은 기간 내 주가가 상승하더라도 거품만 낄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전직 금융위원장 출신의 고위 인사는 6일 “밸류업을 하기 위해서는 성장과 기업 실적이 양대 축”이라며 “이를 제외한 대책은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정부도 성장의 중요성은 알고 있다. 이날 한국은행을 방문한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산업과 기업 전반의 역동성이 크게 저하됨과 동시에 생산연령인구 감소 등 인구 위기가 현실화하며 잠재성장률이 지속 하락하고 있다”면서 경제·사회 시스템 개혁이 시급하다고 밝혔다.
밸류업 대책 기술적 요인에 한정
하지만 정부의 밸류업 대책은 △주주가치 제고 △공정한 시장 질서 확립 △수요 기반 확충 등 기술적 요인에만 한정돼 있다. 세부적으로는 기업 지배구조 보고서에 기업가치 제고 계획 기재와 공시 우수 법인 선정 시 가산점, 주주가치가 높은 기업으로 구성한 상품 지수 개발 등이다. 금융계의 한 관계자는 “거론되는 코리아 디스카운트 대책을 보면 기술적인 방안에만 주력하는 느낌”이라며 “한국은 대외 의존도가 높고 북핵 문제 같은 지정학적 문제가 있어 이런 부분을 다루지 않고는 반쪽짜리에 불과하다”고 전했다.
건전재정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기축통화국이 아닌 데다 수출 의존도가 40.8%에 달해 적절한 부채 비율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재정 건전성이 무너지면 해외 투자자들이 대거 이탈할 수 있기 때문이다. .
하지만 한국의 재정 상황은 빨간불이 들어온 상태다. 전영준 한양대 경제금융학부 교수에 따르면 한국 정부의 부채비율은 지금도 유럽연합 집행위원회(EC)의 건전성(S2) 기준 13.3%로 위험치(6%)의 두 배가 넘는다. 이런 데도 정부는 올 들어서만 금융투자소득세 폐지와 세액공제 연장 등으로 2조 7539억 원 규모의 감세안을 내놓았다.
각종 규제를 풀고 신산업을 육성해야 한다는 얘기도 끊이지 않는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이달 1일까지 지난해 4분기 실적을 발표한 기업 가운데 증권가의 순이익 전망치를 하회하는 기업이 무려 67%다. 반면 인공지능(AI) 반도체 강자인 엔비디아는 5일(현지 시간) 전날보다 4.79% 급등한 693.32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시가총액만 1조 7130억 달러(약 2274조 원)다.
규제풀고 신산업 육성…엔비디아 주가 강세
세련된 관치가 부재한 것도 한국 증시를 갉아먹는 대표 요인이다. 세계적으로 금융주는 고배당주로 꼽히지만 국내 1위인 KB금융의 12개월 선행 주가순자산비율(PBR)은 약 0.42배로 미국 JP모건체이스(약 1.53배)의 3분의 1에도 못 미친다. 시장에서는 금융주의 낮은 PBR은 관치 때문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전직 4대 금융지주 회장은 “한국 은행 지주사들의 PBR이 0.3~0.4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감독 당국이 배당부터 영업, 인사까지 일일이 간섭하면서 벌어진 일”이라고 비판했다.
앞서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당국이 요구하는 충당금 조건에만 맞춘다면 초과액을 주주 환원하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했지만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과 관련해 손실 인식을 미루거나 당연한 책임을 미루는 금융사에 대해서는 “시장에서 퇴출도 불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업계에서는 건전성 비율이나 대주주 적격성을 맞추지 못할 경우면 모를까 충당금 적립이나 금감원장의 지시 이행 여부를 놓고 퇴출시킬 수는 없다는 지적이 쏟아진다. 최인 서강대 경제학부 교수는 “정부는 장·단기와 미시·거시 로드맵을 정해 청사진을 제시해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