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의단체 발표만 보면 나흘 뒤부터 인턴, 레지던트 전원이 병원을 떠난다는 얘긴데, 당장은 아무런 움직임도 없습니다. 무작정 찾아가서 사직서를 언제 낼거냐고 물을 수야 없지 않습니까. ”
서울 상급종합병원 관계자는 16일 “연일 쏟아지는 언론 보도가 무색할 정도로 현장에선 아직까지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수도권 대형병 전공의들이 정부의 의과대학 증원에 반발해 전원 사직서를 제출하기로 결정하면서 ‘의료대란’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정부와 의료계의 강대강 대치가 이어지는 가운데 서울성모병원 등 가톨릭중앙의료원 산하 3개 수련병원에서 보건복지부의 업무개시명령에 불응한 사례가 발생하며 현 정부의 의대 증원 추진 관련 첫 법적 조치가 내려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대한전공의협의회는 '빅5'라 불리는 서울 소재 상급종합병원 5곳(서울대병원·세브란스병원·삼성서울병원·서울아산병원·서울성모병원) 전공의 대표들과 논의한 결과 오는 19일까지 해당 병원 전공의 전원이 사직서를 제출하고 20일 오전 6시 이후 근무를 중단하기로 했다고 16일 밝혔다. 이들은 전일(15일) 오후 11시부터 이날 오전 2시까지 긴급 회동을 갖고 정부의 의대 증원에 대한 대응방안 등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초 삼성서울병원 전공의들은 16일 전원 사직서를 제출하기로 뜻을 모았으나 빅5 병원과 연대해 단체행동에 나서기로 선회하면서 아직까지 공식 접수 사례는 없는 것으로 파악된다. 대전협은 빅5 병원 전공의 대표들이 위원으로 참여하는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해 향후 수련병원 전체를 대상으로 사직서 제출 참여 여부를 조사할 예정이다.
전공의는 여러 의사단체 가운데 파업 시 가장 파급력이 큰 집단으로 꼽힌다. 대형 종합병원에서 야간·휴일 당직을 도맡을 뿐 아니라 연차가 올라가면 중증·응급 환자 수술에도 참여한다. 이들이 집단으로 사직서를 내거나 연차를 쓰면 신규 입원이 막히고 응급실·중환자실 운영에 차질이 생긴다. 전공의들의 집단행동 규모가 커지고 장기화하면 외래진료 및 수술 일정이 연기될 가능성도 커진다. 복지부에 따르면 ‘빅5’ 병원에 등록된 인턴, 레지던트를 합치면2700여 명으로 전체 전공의(1만3000여 명)의 약 21%를 차지한다. 서울대병원의 경우 전체 의사 1600여 명 중 전공의가 740명(46.2%)으로 절반에 가깝다. 빅5 병원 관계자는 “당장 예약된 진료 일정을 소화하는 데는 무리가 없을지 몰라도 며칠 버티기 힘들 것”이라며 “전임의, 교수들로 부족한 인력을 메운다고 해도 공백이 불가피한데 뾰족한 수가 없어 난감하다”고 말했다.
지난 2020년 문재인 정부가 의대 증원을 추진했을 때도 전공의 80% 이상이 의료현장을 이탈하면서 의료 현장의 혼란이 극심했다. 코로나19 팬데믹까지 겹치며 의료공백 우려가 커지자 정부는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정부가 2020년 의대 증원 추진 당시보다 훨씬 더 강경한 태도를 유지하는 건 과거와 같은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인 셈이다.
복지부는 전공의들이 의료대란의 핵심 키를 쥐고 있다고 보고 이들의 집단행동에 대해 발 빠르게 초동 조치를 취했다. 이달 6일 의대 정원 증원 발표 직후 의사들의 집단행동에 엄정하게 대응하겠다면서 업무개시명령에 불응할 경우 의사 면허가 취소될 수 있다는 점을 언급했고, 대한의사협회에 ‘집단행동 및 집단행동 교사 금지 명령’을 내렸다. 이튿날에는 전공의들이 집단으로 퇴사하는 상황을 사전에 막기 위해 각 수련병원에 ‘집단사직서 수리 금지 명령’도 내렸다. 설 연휴 직후 전공의 등 의사단체의 집단행동이 본격화할 것이란 관측과 달리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던 건 정부의 강경한 기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었다.
공교롭게도 전공의들이 치르는 전문의 실기 시험이 종료된 15일 박단 대전협 회장(세브란스병원 소속)이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수련 포기를 선언하면서 전공의들은 크게 동요하는 분위기다. 15일 원광대병원은 22개과 전공의 126명 전원은 사직서를 냈다고 밝혔다. 이들은 다음 달 15일까지 수련한 뒤 16일부터 사직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대병원 소속 전공의 7명도 전날 개별적으로 병원 측에 사직서를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복지부는 15일 24시 기준 이들을 포함한 총 7개 병원에서 전공의 154명 사직서를 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다만 원광대병원의 경우 레지던트 7명만 사직서를 냈으며, 현재까지 사직서가 수리된 병원은 없는 상태다.
일선 병원들은 빅5의 결의를 계기로 전국의 다른 병원 전공의들이 집단행동에 동참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대책 마련에 나섰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협의회는 이날 오전 긴급 이사회를 열어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기로 의결하고 관련 절차를 밟고 있다. 정부와 의료계 '강대강' 대치가 이어지며 긴장감이 고조되던 차에 인턴, 레지던트 등 전공의와 의대생들의 집단행동이 본격화하자 신속한 의사 결정을 위해 비대위를 꾸리기로 결정했다는 방침이다. 대다수 수련병원들은 매일 전공의 근태와 사직 여부 등을 파악하느라 분주하다.
복지부는 유튜브 등 SNS를 중심으로 몇몇 대학병원 전공의들이 집단 사직서를 제출한다는 풍문이 돌며 환자들의 불안감이 커지자 사실 관계 파악에 나섰다. 서울성모병원을 포함한 가톨릭중앙의료원 산하 8개 병원과 고대구로병원·가천대길병원·원광대병원·경찰병원 등의 경우 현장점검을 진행했다.
'의사 집단행동 중앙사고수습본부'에 따르면 서울성모병원을 포함한 가톨릭중앙의료원 산하 8개 병원과 고대구로병원·가천대길병원·원광대병원·경찰병원 등 12개 수련병원에 대해 현장점검을 실시한 결과 실제 사직서가 제출된 곳은 10곳이었다. 이날 오후 6시 현재 이들 병원에서 총 235명이 사직서를 냈으나 이를 수리한 병원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 중 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48명)과 부천성모병원(29명), 성빈센트병원(25명), 대전성모병원(1명)을 합쳐 총 103명이 실제로 근무를 하지 않았다. 복지부는 의료법 제59조에 따라 이들에게 업무 개시를 명령했고, 서울성모병원·부천성모병원·대전성모병원에서 각 1명씩 모두 3명을 제외한 전원이 복귀한 것으로 확인됐다.
복지부는 복귀하지 않은 3명의 전공의가 속한 병원의 수련 담당 부서로부터 업무개시명령 불이행 확인서를 받았다고 밝혔다. 다만 아직 구체적인 조치를 언급하지는 않았다. 업무개시명령을 위반하면 의료법 제66조에 따라 면허 자격정지 처분이 내려지거나 제88조에 따라 3년 이하의 징역 혹은 3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다.
1심 재판에서 금고 이상의 형이 확정되면 개정 의료법에 따라 '면허 취소'가 가능하다.
박민수 복지부 제2차관은 이날 '의사 집단행동 중앙사고수습본부(중수본)' 브리핑에서 "정부는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기 위해 환자를 담보로 한 모든 행위에 대해 법적·행정적 조치를 하겠다"면서 "2020년과 같은 (전공의) 구제 절차는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부는 2020년 집단휴진 당시에도 업무개시명령을 어긴 전공의 등 10명을 고발했다가 취하한 바 있다. 이를 두고 박 차관은 "당시 9·4 의정 합의에 따라 고발을 취하했으나 이번에는 사후 구제나 선처는 없을 것"이라며 으름장을 놨다. 아울러 "업무개시명령을 위한 전공의 연락처를 오늘부터 확보하기 시작했다"며 "전공의들은 명령을 받는 즉시 복귀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의료계 일각에서는 정부가 강경 기조로 일관하고 있는 데다 각 수련병원에 ‘집단 사직서 수리 금지’ 명령을 내린 만큼 실제 사직서가 수리될 가능성이 낮다는 관측이 나온다. 실제 서울아산병원은 15일 응급실 전문의 일부가 사직서를 제출하고 병원을 떠났다가 당일 밤 전원 복귀했고, 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과 부천성모병원, 성빈센트병원 등 사직서 제출률이 높았던 병원의 전공의들이 전원 복귀 이행 확인서를 제출하며 일단락됐다.
다만 전공의 등 젊은 의사들을 중심으로 한 집단행동의 불씨는 여전하다. 의료계 관계자는 "전공의들이 법적 책임을 피할 수 있는 집단행동 방안을 모색 중"이라며 "2월 말~3월 초께 전공의 사직과 의대생들의 동맹휴학이 잇따르면 의료대란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