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너럴모터스 한국 사업장(한국GM)이 인천 부평 공장에 플러그인하이브리드차량(PHEV) 생산 설비 구축을 위해 6900억 원을 투자하는 방안을 추진한다. 정부가 지난해 외국인투자기업의 브라운필드(기존 시설 활용) 투자에 대해 최대 50%의 현금 지원을 약속한 후 나온 첫 대규모 투자 계획이다. 한국GM은 전기차 수요에 따라 부평 공장에 들어설 PHEV 생산 시설을 전기차 공장으로 전환하는 것까지 염두에 두고 이번 투자를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21일 업계에 따르면 한국GM은 이런 내용을 골자로 한 부평 공장 PHEV 시설 투자 계획을 확정하고 이달 말 산업통상자원부에 현금 지원 본심사를 신청할 예정이다. 산업부는 투자 계획이 접수된 날로부터 60일 안에 투자의 적절성을 따져 한국GM 측에 정확한 현금 지원 규모를 알려줘야 한다. 한국GM의 PHEV 설비 투자에 대한 정부 지원금이 확정되면 미국GM 본사는 4월 중에 이사회를 열어 최종 투자 승인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다. 미국 GM의 최종 승인이 떨어지면 한국GM 부평공장은 국내에 들어설 첫 번째 PHEV 전용 공장이 될 전망이다.
투자액의 50%를 현금으로 지원…美GM의 PHEV 생산거점 떠올라
2016년 메리 배라 회장이 취임한 이래 GM은 전기차 전환에 속도를 내왔다. 2035년까지 모든 차량을 전기차로 생산하며 하이브리드차를 만들지 않고 내연기관에서 전기차로 바로 넘어가겠다고 밝힌 것도 배라 회장 체제에서였다. GM이 전기차 전환에 속도를 낼수록 한국GM의 전기차 생산 가능성도 함께 부각됐다. 한국에는 GM의 신차 개발을 담당하는 디자인센터가 있고 배터리 공급망도 갖춰져 있어서다.
하지만 GM 본사와 한국GM은 “국내에서의 전기차 생산 계획은 없다”는 입장을 되풀이해왔다. GM이 전기차를 북미 지역에서 생산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지만 일부 외투기업들 사이에서는 대규모 투자를 유인할 수 있는 정부 차원의 인센티브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왔다. 전기차 공장을 지을 역량은 충분하지만 투자 환경이 미국·유럽 등 다른 선진국과 비교해 좋지 않았다는 얘기다.
상황이 바뀐 것은 지난해 하반기부터다. 글로벌 전기차 수요 둔화에 직면한 GM은 지난해 10월 미시간주 공장의 전기픽업트럭 생산을 1년 연기한 데 이어 올해 전기차 생산 목표량도 40만 대에서 20만~30만 대 수준으로 낮췄다. 배라 회장은 지난달 30일 실적 발표 콘퍼런스콜에서 “전기차 도입이 지연되고 있다”고 인정한 뒤 “북미 지역에서 PHEV를 재출시하겠다”고도 말했다.
문제는 중국 시장을 제외하면 생산하지 않았던 PHEV를 어디서 안정적으로 생산할 수 있느냐다. 한국GM의 부평 공장이 GM 본사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이유다. 한국 사업장은 북미 지역을 제외한 GM의 글로벌 생산기지(멕시코·캐나다·한국) 가운데 생산 효율성이 높은 공장으로 꼽힌다. 지난해 부평 공장과 창원 공장에서는 각각 26만 3000대(쉐보레 트레일블레이저·뷰익 앙코르·뷰익 엔비스타), 20만 4900대(트랙스)의 차량이 생산돼 80% 이상이 북미 지역으로 수출됐다.
신규·증설이나 고용창출 없어도 첨단산업 시설 교체면 인정…산업부·인천광역시 반씩 부담
정부 차원의 외투기업 인센티브가 올해부터 대폭 늘었다. 한국GM의 대규모 투자 계획을 이끌어낸 원동력이다.
하지만 외국인 투자 현금 지원 제도의 전체 예산은 지난해까지 500억 원에 불과했다. 수도권 공장의 경우 지방정부가 50%를 매칭해도 총예산은 1000억 원에 그쳤다. PHEV 등 전기차 공장이나 배터리·반도체와 같은 국가전략기술 사업화 시설의 경우 설비 교체에만 수천억 원의 투자비가 소요된다. 외투기업의 투자를 이끌어내는 데 턱없이 부족한 규모다. 한국GM은 2022년 처음으로 흑자 전환에 성공해 지난해부터 시행한 전기차 공장 세액공제 혜택도 거의 받지 못했다.
하지만 산업부는 지난해 7월 외투법 시행령을 개정해 국가 전력 기술 사업화 시설(PHEV 등 전기차 공장) 구축을 위해 기존 시설을 교체하는 투자에 대해서도 외투 현금 지원 대상에 포함시켰다. 기존에는 공장 시설의 신·증설 투자(그린필드)나 추가 고용 창출의 경우만 지원이 가능해 외투기업의 대규모 투자를 이끌어내는 데 한계가 있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다.
한국GM은 부평 공장의 PHEV 생산 설비 구축을 위해 총 6900억 원을 투자할 예정이다. 외투법상 정부 현금 지원 한도는 투자액의 50%다. 수도권 공장은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절반씩 부담한다. 현 인센티브 정책으로 받을 수 있는 최대 금액이 3450억 원에 이른다. 지방정부인 인천광역시가 인센티브의 절반(1725억 원)을 낼 수 있느냐가 관건이지만 이전보다 인센티브 정책이 개선된 것은 분명하다. 최종 현금 지원 액수는 정부의 심사 결과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사업 전략상 PHEV를 다시 생산해야만 하는 GM 본사 입장에서 수천억 원대의 현금 인센티브는 매력적인 카드란 얘기다.
배터리 협력사 본사와 근접…부평공장 유휴부지 활용 전망
LG에너지솔루션과 삼성SDI 등 북미 지역에 전기차 배터리 합작공장을 짓고 있는 글로벌 배터리 기업들의 본사와 국내 생산공장이 부평공장과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는 점도 GM이 PHEV 생산 거점으로 한국GM을 낙점한 배경으로 꼽힌다. GM은 LG에너지솔루션과 북미 합작사 얼티엄셀즈를 설립해 2022년 하반기 양산을 시작한 오하이오주 1공장을 비롯해 테네시주·미시간주에서 합작공장을 가동하거나 건설 중이다. 삼성SDI와는 미국 인디애나주에서 2026년 가동을 목표로 배터리 합작공장을 짓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의 오창 공장과 삼성SDI의 울산 공장은 모두 차로 이동할 수 있는 거리다. PHEV 생산을 위해서는 안정적인 배터리 조달이 필수인 만큼 한국GM 부평 공장이 GM의 PHEV 생산 거점으로 유리하다는 분석이다.
한국GM은 부평 공장의 유휴 부지를 최대한 활용할 방침이다. 2022년 폐쇄한 2공장(조립 공장)이 거론됐지만 기존 1공장의 엔진 공장(파워트레인), 금형 공장, 반조립(CKD) 공장들의 여유 공간을 이용하는 쪽이 유력하다. 엔진 공장은 말리부·캡티바 등을 생산했던 2공장이 문을 닫은 후 시설의 상당 부분이 비어 있다. 한국GM은 투자계획서 상에 PHEV 생산설비를 설치할 공간으로 ‘2공장’이 아닌 ‘1공장 인근 부지’라고 표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산업부가 지난해 외투법 시행령을 개정해 브라운필드 투자도 현금지원 대상에 포함시킴에 따라 한국GM이 기존 공장의 유휴부지를 활용하는 길이 열렸다.
한국GM은 PHEV 생산설비를 투자하면서 중장기적으로 전기차 전환에도 대응할 방침인 것으로 전해졌다. PHEV는 내연기관 기반의 하이브리드차량(HEV)에 추가로 배터리를 장착하고 전기 충전구를 장착한 차량이다. 100km 안팎은 전기차(EV)모드로 주행할 수 있고, 배터리를 모두 쓰면 내연기관 엔진을 활용해 주행한다. 가솔린을 연료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순수 전기차는 아니지만 HEV가 내연기관 쪽에 가깝다면 PHEV는 순수 전기차에 더욱 가깝다. 구동 시스템이 전기차와 유사해 내연기관에서 전기차로 넘어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