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전 11승 103패.’
지난해 행동주의 펀드가 기업을 상대로 주주총회에 낸 안건의 가결·부결 전적이다. 최대주주 대비 턱없이 적은 지분과 ‘탐욕적 투기 세력’이라는 부정적 프레임에 갇혀 투자자들의 큰 호응을 끌어내지 못했다.
올해도 이런 양상에 큰 변화가 생길 가능성은 낮다는 게 지배적인 관측이다. 다만 정부의 밸류업 프로그램 추진 등 우호적인 분위기를 등에 업고 기업 스스로 자사주 매입 소각 등 주주 환원책을 내놓게끔 압박하면 기대 이상의 성과를 올릴 수 있다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4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의결권 자문사 서스틴베스트가 2023년 정기 주주총회에서 주주 제안 대상 기업 26개사의 114개 안건을 분석한 결과 최대주주와 표 대결을 펼쳐 가결된 안건은 11개(9.6%)에 불과했다. 나머지 103개 안건 중 89개(78.1%)는 부결됐고 14개(12.3%)는 자동 폐기 등 절차를 거쳤다.
주총에서 기업과 표 대결을 펼쳐 일부라도 승리를 거둔 행동주의 펀드는 3곳에 불과했다. 통과된 안건은 대부분 감사나 감사위원 선임 건이었다. 상법상 감사와 감사 선임의 경우 대주주도 의결권을 3%까지만 인정해 소액주주가 표 대결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기 때문이다. 배당 확대 등 주주 환원 강화 안건은 모두 부결되거나 자동 폐기 처리됐다.
하지만 올해는 사뭇 다르다. 밸류업이라는 순풍이 불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행동주의 캠페인을 요약하면 ‘주주 환원을 위한 자사주 매입 후 소각’과 ‘이사회 내 독립성 및 다양성 강화’다. VIP자산운용이 올 1월 8일 삼양패키징에 대한 지분 보유 목적을 단순 투자에서 일반 투자로 변경하며 자사주 매입·소각을 요구하고 트러스톤자산운용이 태광산업에 사외이사 후보자 2명과 사내이사 후보자 1명을 추천하며 이사회 진입을 추진하는 것 등이 대표적이다.
기업 압박 전략 역시 눈에 띈다. 이른바 울프팩(wolf pack·늑대 무리) 전략이다. 15일 주총을 앞둔 삼성물산이 대표 사례다. 이날 영국계 행동주의 펀드 팰리서캐피털(보유 지분 약 0.62%)은 삼성물산에 의결권을 행사하겠다고 예고했다. 이로써 삼성물산을 압박하는 행동주의 펀드는 총 6개사로 늘어났다. 앞서 영국계 시티오브런던(약 1.46%), 한국계 안다자산운용, 미국계 화이트박스어드바이저스 등 5개 행동주의 펀드는 삼성물산에 자사주 5000억 원 매입과 보통주 1주당 4500원(우선주 4550원) 배당 등을 요구했다. 이는 삼성물산 이사회가 제시한 보통주 1주당 2550원(우선주 2600원)보다 75% 많은 규모다.
다만 이런 압박이 다 일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삼성물산 사례의 경우 행동주의 펀드가 기업의 장기 성장 경쟁력까지 훼손하면서 단기 차익을 노리고 있다는 비판 여론이 비등하다. 행동주의 펀드가 소액주주의 입장을 대변한다고 하지만 기업 성장성을 갉아먹는 역기능에 대한 견제 또한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표 대결 대신 물밑 협상 전략을 펼치는 곳도 있다. 얼라인파트너는 올해도 KB·신한·하나·우리·JB·BNK·DGB금융지주 등 7개 상장 금융 지주사를 상대로 캠페인을 펼치지만 공개적인 표 대결은 예고하지 않고 있다. 김우진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미국 등 선진국 사례를 볼 때 바람직한 주주 제안 방식은 기업이 진정성 있는 자세로 행동주의 펀드의 요구 사항을 검토하고 협상을 통해 결론을 내는 것”이라며 “정부가 밸류업 프로그램을 추진하면서 기업과 행동주의 펀드가 공생하는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일각에서는 행동주의 펀드가 표 대결에서 패배해도 이전과는 다르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남우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회장은 “행동주의 펀드의 목표는 기업의 변화를 유도하는 것”이라며 “주총 표 대결에서 패했더라도 기업이 주주 친화적인 정책을 펴나가기 시작한다면 성과가 났다고 보는 게 맞다”고 설명했다. 이효섭 자본시장연구원 금융산업실장은 “자본시장의 주인공은 결국 상장사이고, 이들의 중장기 수익 성장이 담보돼야 충분한 주주 환원이 가능하다”며 “앞으로는 행동주의 펀드의 주주 제안이 단기적인 배당 확대, 자사주 매입·소각이 아닌 기업의 본업 경쟁력 강화 방안 촉구 등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꼬집었다.
이사회가 제 역할을 하도록 정부·정치권이 상법 개정에 나서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이 회장은 “상법 개정을 통해 이사의 충실 의무를 확대한다면 주주를 고려한 의사 결정이 이뤄지게 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