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미술 다시보기] 분석 대상이 아닌 눈물

심상용 서울대학교 미술관장

1480년에서 1495년 사이에 그려진 디르크 바우츠의 ‘울고 있는 마돈나’ 사본. 시카고아트인스티튜트1480년에서 1495년 사이에 그려진 디르크 바우츠의 ‘울고 있는 마돈나’ 사본. 시카고아트인스티튜트





성모마리아는 그리스도가 십자가 형틀에 달릴 때와 내려질 때 이미 많이 울었다. 자식 잃은 어미의 통곡, 절규의 시간이 지나갔다. 디르크 바우츠가 1460년께 그린 ‘울고 있는 마돈나’에서 슬픔은 잦아들었다. 눈꺼풀은 격한 슬픔으로 많이 부어올랐고 두 눈은 선홍빛으로 충혈된 상태지만 눈물은 방울이 되어 뺨에 맺히는 정도다. ‘깨끗한 눈물, 신은 우리가 내뱉은 말이 아니라 그 눈물만을 본다(성 베네딕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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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에서 더 중요한 것은 시선이다. 초점은 더 이상 대상에 맞춰져 있지 않다. 마리아의 시선은 죽은 그리스도나 감상자를 향해 있지 않다. 대상을 파악하는 자아의 의지를 완전히 내려놓은,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이는 시선이다. 자극에 대한 감각적 반응은 더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마리아의 생각은 내면으로, 가까운 이곳이 아니라 저 먼 곳을 향하고 있다.

그 ‘먼 곳’에 접근하는 일은 특히 오늘날 지적으로 매우 어렵고, 아마도 언어의 영역을 벗어나는 일이다. 그럼에도 그런 접근이 오히려 미술의 영역에서 더 낯설게 여겨지는 건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왜일까. 시카고대의 미술사 교수 제임스 엘킨스는 15주 동안이나 이 그림의 모작에 임했던 한 학생과 함께 경험했던 일에 대해 들려준다. 그 시간 동안 마리아의 눈물방울은 ‘감정이입을 부추기는 효과’를 넘어 현실이 됐고 눈물은 마리아의 뺨을 넘어 자신의 마음에서도 흘러내렸다. 그런 시간의 부재가 이 메마른 시대를 부추기는 요인이다. ‘미술사학에 직업적으로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그저 지적인 양식을 얻으려 쉴 새 없이 한 이미지에서 다른 이미지로 퍼덕이며 날아다닌다.’ 오늘날 미술사학과 미술이 인내심이라고는 없는 학문 영역이 돼버린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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