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18일 “지난해는 세계무역기구(WTO)가 1995년 출범한 후 처음으로 (금융위기나 코로나19 등 없이) 글로벌 상품 무역이 크게 둔화한 해”라고 우려했다. 세계은행이 1월 발표한 세계전망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상품 무역량 증가율은 0.2% 수준이다. 안 장관은 “무역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의 산업적인 측면에서 보면 지금은 준전시 상태”라고 지적했다.
이는 WTO 체제의 와해와 무관하지 않다. 글로벌 보호무역 확산과 중국의 입김 강화로 자유무역의 산파 역할을 한 WTO가 사실상 ‘식물 기구’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상황을 보여주는 데이터가 24일 확인됐다. 산업부에 따르면 중국의 올해 WTO 분담금 비율이 11.179%(약 2270만 스위스프랑)로 미국(11.426%)과 같은 11%대를 기록했다. 아직 중국이 미국을 역전하지는 않았지만 턱밑까지 올라온 셈으로 두 나라의 수치가 사실상 같아진 것은 2001년 12월 중국의 WTO 가입 이후 처음이다. 미국이 WTO 체제를 주도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중국이 미국과 분담금을 양분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다.
중국은 WTO 가입 뒤인 2002년 2.973%를 부담했다. 한국(2.381%)과 같은 2%대였다. 당시 미국은 15.723%나 내고 있었고 북아일랜드를 포함한 영국도 5.862%를 책임졌다.
이후 중국은 WTO 등에 올라타 세계 공장 역할을 하면서 경제를 키웠다. 중국의 WTO 기여도 역시 이에 비례해 커졌다. 중국은 2005년 3.599%를 거쳐 2008년(5.338%) 처음으로 5%를 넘어선 뒤 코로나19 이후인 2020년 10.096%로 10%를 돌파했다. 같은 기간 미국의 분담금 비중은 꾸준히 감소해 2012년 12.191%, 2020년에는 11.591%까지 내려왔다. 중국의 경우 지난해 비중이 더 높아져 WTO 운영의 10.758%를 떠맡았는데 올해 미국과 같은 11% 선까지 올라온 것이다. 전직 정부 관계자는 “글로벌 무역에서 중국의 입김이 매우 커졌다는 증거”라면서도 “미국과 중국, 양극단이 생겨 WTO 체제의 운영이 더 어려워졌다는 의미로 국제분쟁 조정이 안 돼 각자도생해야 한다는 의미”라고 전했다.
두 나라는 미중 갈등을 겪으면서 사무총장 선임과 운영 방식을 두고 사사건건 부딪혔다. 만장일치제로 운영되는 WTO는 미중 대립 속에 어떤 의사결정도 하지 못했다. WTO 개혁이나 대체 기구 설립에 대한 논의도 표류하고 있는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과 중국의 재정 부담마저 엇비슷해진 것이다. WTO 탈퇴를 천명하기도 했던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당선 여부도 WTO 앞날에 변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