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 의혹'이 제기된 정재호 주중한국대사가 언론과의 소통 창구는 꽁꽁 닫은 채 사적인 행사나 다름없는 일정은 강행하며 직원들의 빈축을 사고 있다.
1일 중국 외교가에 따르면 정재호 대사는 오는 9일 일부 국가의 주중 대사 10여명을 초청해 베이징 한국문화원에서 함께 영화를 관람할 예정이다. 정 대사의 초청으로 한국 영화를 관람하고 한국 요리 등 다과를 즐기는 일종의 친목 행사이다. 정 대사는 부임 이후 수 차례 관련 행사를 가져왔다.
한국문화원에서 이뤄지는 이 행사에 대사관과 문화원 직원들은 이미 한 달여 전부터 신경이 곤두서 있다. 대사관에선 사전 동선을 체크하고 행사 진행에 차질이 없는지 수차례 문화원을 찾고 있다. 상영할 영화를 고르느라 일부 직원들은 주말 등 업무 시간 이외에도 영화를 봤던 것으로 알려졌다.
행사가 열리는 문화원 측은 신경쓸 일이 더욱 많다. 영화진흥위원회는 상영할 영화의 허가를 받기 위해 중국 당국과 접촉해야 했다. 이번 행사에는 한국 요리연구가까지 동원해 한국 음식을 제공할 계획으로 알려졌다. 이전 행사에서 “맥주의 김이 빠졌다”는 지적이 나온 것으로 전해지며 행사 관계자들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준비를 하느라 여념이 없다. 한 관계자는 “한국 문화를 알리려면 한옥으로 꾸며진 대사 관저에서 할 수도 있을 것”이라며 “그것보다 행사 자체가 꼭 필요한지 의문”이라고 볼 멘 소리를 했다.
국가를 대표해 다른 나라에 파견돼 외교를 맡아보는 최고 직급인 대사가 다른 나라 대사들과 만나 정보를 교환하고 한국 문화를 알리는 행위 자체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이를 위해 대사관과 문화원 직원들이 대거 동원돼 기존 업무에도 지장이 생긴다는 점이다. 외교가의 한 소식통은 “미국, 일본 등 주변 강대국도 아닌 저개발국가나 개발도상국 대사가 참석자들이라 그다지 중요한 행사로 보이지도 않는다”며 “차라리 한한령(한류 금지령)으로 꽉 막힌 한국 콘텐츠의 중국 진출을 풀기 위해 중국 당국자들을 만나 한국 영화의 우수성을 홍보하는 것이 나아 보인다”고 지적했다.
정 대사는 ‘중국통’으로 알려져 있고 과거 어느 대사보다 중국어에 능통하다는 평가지만 중국 외교부 인사와의 접촉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소속 박홍근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정 대사가 부임한 2022년 8월부터 지난해 상반기까지 약 1년간 현지 주요 인사를 만나는 데 쓰게 돼 있는 네트워크 구축비를 활용해 중국 외교부와 접촉한 횟수는 1건에 그쳤다. 지방 출장 중에 해당 성·시 주요 인사와의 만남은 있었지만 중앙 정부, 특히 꽉막힌 한중 관계를 풀기 위한 중국 외교라인과의 만남은 거의 없었다.
정 대사는 외교적 중요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에도 영화 관람은 일정대로 진행할 것으로 알려졌으나 1일 예정된 한국 특파원단 대상 월례 브리핑은 일방적으로 취소했다.
갑질 논란이 불거진 뒤 특파원들과 처음 대면하는 브리핑인 만큼 관심이 쏠렸으나 지난달 29일 주중대사관 측은 사전 협의 없이 ‘일신상의 사유’라고만 밝힌 채 브리핑 당사자를 공사참사관으로 대체한다고 밝혔다.
정 대사는 지난달 28일 갑질 논란이 불거진 이후 취재진과의 접촉을 피하고 있다. 갑질 신고를 당한 사실이 보도된 당일 그는 평소와 달리 지하 주차장에서 관용차를 타고 대사관 밖으로 향했다. 대사관에서 대기하던 취재진이 “갑질 논란에 대한 입장이 있냐”는 등의 질문을 던졌지만 정 대사는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았다.
이후 대사관은 “언론 보도 내용은 일방의 주장만을 기초로 한 것”이라며 “관련자의 명예가 걸려 있는 바, 추측 보도 자제를 요청한다”라는 내용의 짧은 입장문만 냈다. 일방의 주장을 만회할 기회임에도 스스로 걷어찬 셈이다.
월례 브리핑은 언론과의 접촉을 기피하는 정 대사를 특파원단이 사실상 유일하게 대할 수 있는 공식 창구지만 이 달에 열리지 않을 경우 두 달 만인 5월에나 개최된다.
정 대사는 취임 직후 특파원 간담회와 월례 브리핑에서 자신의 사적 발언을 실명 보도했다는 이유로 월례 브리핑을 ‘비정상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모두 발언 이후 이뤄지던 질의응답을 사전에 이메일로 접수된 질문에만 스스로 읽고 답하는 '자문자답' 형식으로 바꿔버렸다. 정 대사는 1년 넘게 현장 질문은 아예 받지 않아 ‘불통’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지만 실명보도 재발 방지만 강조하며 기존 입장을 되풀이 하고 있다.
정 대사는 지난 2월 브리핑에선 이를 개선해줄 것을 요구하며 브리핑 이후 대사를 뒤따르며 계단을 오르던 한 특파원에게 업무공간을 침해하지 말라고 막아서기도 했다.
브리핑 내용 자체도 지난 한 달 동안 대사의 외부 활동을 설명하거나 언론에 대부분 나왔던 내용 등 시의성이 떨어지는 정보 위주라 ‘알맹이가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 결과 3월 브리핑에선 특파원단 참석자가 4명에 불과할 정도로 월례 브리핑은 특파원단들로부터 외면 받고 있다. 굳이 시간을 내 참석해야 얻을 정보가 없다는 평가다.
주중대사관은 브리핑 형식에 대한 비판에 “특파원은 주중대사관 출입기자가 아니며 대사관은 특파원들의 중국 취재를 지원하는 차원에서 다양한 브리핑을 시행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주중대사관 주장과 달리 특파원들은 부임 후 출입신청서를 제출하고, 주중대사관이 발급한 출입증을 받아야만 대사관을 출입할 수 있다. 특파원들과의 소통이 부족하다는 지적에도 주중대사관은 “특파원단과의 오찬 간담회와 신임 특파원들과의 차담회에서 즉문즉답을 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노력을 기울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 대사 취임 후 1년 8개월 동안 오찬 간담회는 단 2차례에 불과하다. 사실상 형식적인 자리였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장 질의응답을 받는 브리핑 형식은 차치하더라도 전체는 물론 그룹별 모임 등 다양한 형태로 특파원단과 자주 소통하는 주요 국가의 대사와는 확연히 비교가 된다.
갑질 의혹 제기 이후 정 대사는 본인 뿐만 아니라 대사관 직원들의 언론 접촉 자제령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대사관 관계자들은 미리 잡힌 특파원들과의 약속을 미루고 있다. 한 직원은 “지금 분위기가 그렇다”며 말을 아꼈다.
앞서 이달 초 주중대사관에 근무하는 한 주재관은 정 대사를 갑질로 외교부에 신고해 외교부가 조사에 착수했다.
해당 주재관은 업무시간에 정 대사의 방으로 불려가 모욕적인 발언을 들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이전에도 수차례 인신모독성 발언을 듣자 해당 발언을 녹음했고, 이를 외교부에 제출한 것으로 전해졌다. 해당 주재관은 외교부가 아닌 다른 부처에서 파견된 것으로 알려졌다.
임수석 외교부 대변인은 28일 정례브리핑에서 "(비위) 관련 사안이 인지되면 철저히 조사한 후 원칙에 따라 한 점 의혹 없이 처리하고 있다"며 "이번 사안에 대해서도 동일한 원칙에 따라서 철저히 조사하고 사실관계를 확인해 나가고자 한다"고 밝혔다.
중국도 이번 사태에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 중국 관영 환구망은 “주중 한국대사가 부하 직원들을 힘들게 했다는 이유로 신고를 당한 사실이 폭로됐다”며 “한국 외교부가 조사에 나섰다”고 한국 언론을 인용해 보도했다.
이와 관련 정치권으로도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상임 공동선대위원장은 지난달 29일 경기 성남시 이광재(경기 성남분당갑) 후보 선거사무소에서 열린 현장 선대위 회의에서 “바로 소환해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 대사는 서울대 교수 출신으로 윤석열 대통령의 충암고 동기·동창이자 서울대 동문으로 오래전부터 윤 대통령과 개인적인 인연을 이어온 친구 사이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