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1위 비철금속 제련 기업인 고려아연(010130)과 최대 주주 영풍(000670) 간 경영권 갈등으로 인해 한국의 배터리 탈(脫) 중국 행보에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 70년 넘게 이어온 양사의 동업 관계가 2차전지 투자 문제로 사실상 와해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이 리튬·흑연에 이어 올해 들어 황산니켈 분야에서 한국의 최대 수입국으로 올라설 수 있는 만큼 황산니켈 국산화가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5일 서울경제신문이 무역협회 수출입통계를 분석한 결과 대(對)중국 황산니켈 수입량은 올해 1~2월 기준 2700톤으로 전체 수입 규모(6880톤) 중 39.2%를 차지했다. 지난해의 경우 중국산 비중이 21.8%에 그쳤지만 올 초 들어 점유율이 2배 가량 확대된 것이다. 한국은 지난해 3월까지만 해도 중국으로부터 황산니켈을 전혀 들여오지 않았지만 하반기부터 수입을 본격적으로 늘렸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핀란드가 최대 수입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지만 현 추세대로라면 올해 연간 기준으로 중국이 황산니켈 최대 수입국이 될 가능성이 크다.
황산니켈은 배터리 핵심 원자재 중 하나로 에너지 밀도 등 전기차 배터리 성능을 좌우한다. 리튬·코발트·망간과 함께 양극재 원료로 활용된다. 특히 국내 배터리 업계에선 니켈 함량이 80~90%로 높은 하이니켈 배터리를 주력 생산하는 만큼 양극재 제조사를 중심으로 황산니켈 수요가 크다.
자원빈국인 한국에서 중국산 황산니켈 수입이 급증하고 있는 것은 가격경쟁력 때문으로 풀이된다. 중국산 원자재는 가공할 때 드는 전기료나 환경규제에 대한 부담이 덜한 데다 한국 입장에서는 수입할 때 발생하는 물류비도 비교적 가장 적은 편이다. CNGR을 비롯한 중국 소재 업체들은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니켈 중간재를 조달해 자국에서 황산니켈로 제련한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에 따르면 전 세계 황산니켈 생산량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2015년 47.0%에서 2022년 76.8%로 확대됐다.
이 때문에 가뜩이나 심각한 중국산 의존도 문제가 악화하고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리튬, 코발트, 흑연 등 주요 배터리 원자재는 이미 수입량 중 중국산 비중이 80%가 넘는 와중에 그나마 의존도가 낮았던 니켈마저 중국산의 공세가 더욱 거세지고 있기 때문이다.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해외 주요국에서 미국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이나 유럽엽합(EU)의 핵심원자재법(CRMA) 등을 앞세워 중국산 광물을 배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탈 중국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문제는 국내 황산니켈 공급망 구축과 관련해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고려아연이 2차전지 소재 투자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영풍과 경영권 갈등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영풍은 현대차그룹 해외 계열사 ‘HMG 글로벌’에 제3자 배정 유상증자 형태로 발행한 보통주 104만5430주(5%)가 위법하다며 지난달 고려아연을 상대로 ‘신주 발행 무효의 소’를 제기했다. 앞서 지난해 현대차그룹은 니켈 공급망 확보 차원에서 고려아연에 5000억 원을 투자하고 지분 5%를 인수했다.
고려아연은 울산에 연 4만2600톤(니켈 금속량 기준) 규모의 생산능력을 갖춘 올인원 니켈 제련소를 짓고 있다. 총 5063억 원을 투입해 2026년부터 본격 양산을 시작할 계획이다. 인도네시아를 중심으로 니켈 원재료를 조달해 중국을 제외한 세계 최대 니켈 제련 기업으로 도약하겠다는 포부다. 2030년 전기차 글로벌 톱3로 자리매김하겠다는 현대차그룹으로서는 황산니켈 등 배터리 핵심 소재의 안정적인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영풍은 현대차그룹의 지분 확보가 고려아연의 경영권 유지 목적이라고 본다. 영풍에 따르면 고려아연의 우호세력으로 분류되는 현대차그룹의 지분 투자로 고려아연 최씨 일가 3세인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 측 지분율이 영풍 장씨 일가 2세인 장형진 영풍그룹 고문 측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이후에도 두 오너 일가 간 지분 경쟁이 이어지면서 현재 최씨 일가 측 지분율이 약 33%로 장씨 일가 측을 약 1%포인트 앞서는 것으로 알려졌다.
3세 경영으로 이어지며 영풍과 고려아연 간 사업 포트폴리오가 달라진 점도 갈등의 기폭제로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영풍그룹은 1949년 고 장병희(영풍)·최기호(고려아연) 창업주가 공동 설립으로 출범했다. 두 창업주는 황해도 사리원(봉산군) 태생으로 동향인 데다 ‘열심히 일한 만큼 보상받을 수 있는 정직한 비즈니스’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마음이 통했다고 한다. 이들은 경북 봉화군의 연화광산을 사들인 후 일본의 우수 제련기업에게 노하우를 지원받는 형태로 사업 모델을 구상했다. 실제로 직접 현해탄을 건너다니며 도호아연 임원들을 계속 설득했고 ‘제대로 가공 능력을 갖춘 제련소로 성장하더라도 고객을 쉽게 뺏지 않겠다’고 약속한 끝에 기술 자문을 받게 됐다. 결국 1970년 경북 봉화군에 영풍 석포제련소, 1978년 경남 온산에 자매사인 고려아연 온산제련소를 세워 제철산업의 필수 소재인 아연의 국산화를 이끌었다.
하지만 2세 경영 이후 영풍은 1990년대 광업을 접는 과정에서 영풍전자·코리아써키트(007810)·인터플렉스(051370) 등 전자 계열사를 잇따라 인수하며 전자부품 산업에 진출했다. 영풍의 인쇄회로기판(PCB) 부문 매출은 2013년 4400억 원에서 2022년 3조 원으로 크게 성장했다. 그런 사이 고려아연은 비철금속 제련 사업에 집중했고 전기차 시장이 크게 성장하면서 제련 기술력을 활용해 배터리 소재 사업에 미래 명운을 걸고 있다. 영풍의 석포 제련소도 여전히 세계 3~4위 종합 비철금속 제련소로 남아 있다.
앞으로 관건은 법원이 누구의 손을 들어주느냐 하는 것이다. 조명현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전 기업지배구조원장)은 “신주를 제3자에 배정하는 목적에는 기업 경영에 도움이 되는 신기술의 도입이 포함돼 있어 금속 제련 기업인 고려아연이 2차전지 소재 분야 신(新)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현대차그룹을 주요 주주로 유치한 데엔 문제가 없다”면서도 “경영권 방어를 목적으로 하는 제3자 배정 신주발행은 위법의 소지가 있는 만큼 법원이 영풍과 고려아연 간 경영권 분쟁의 발단 시점을 언제부터로 판단하는지가 관건”이라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