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예산정책처는 한국의 시간당 노동생산성이 2022년 기준 43.1달러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 회원국 가운데 29위에 불과하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그러나 일각에선 제22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 야당이 압승하면서 노동 개혁의 동력을 잃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노동계 출신 인사 16명이 국회에 입성하게 된 데다 야당인 더불어민주당과 민주당의 비례 위성정당인 더불어민주연합에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과 금융노조 출신 등이 포진해 있기 때문이다. 전직 정부 고위 관계자는 12일 “여소야대라고 해서 개혁 작업을 못할 이유는 없다”면서 “이럴 때일수록 정부와 정치권이 머리를 맞대고 노동 개혁을 서둘러야 한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한국 노동시장의 경직성을 깨는 일이 시급하며 임금과 고용 유연성을 함께 높이는 대책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박윤수 숙명여대 경제학부 교수가 2011~2012년 OECD 국제성인역량조사 데이터를 활용해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한국에서는 근로자의 수리, 문제 해결 능력(인지능력)이 임금에 끼치는 영향력이 다른 나라에 비해 작았다. 한국의 경우 인지능력이 한 단위(10백분위수) 올라갈 때마다 임금이 약 0.8% 상승해 약 2.2%의 상승률을 보인 독일·일본은 물론이고 미국(약 2.7%)보다도 낮았다.
반면 근속연수가 임금에 끼치는 영향은 다른 나라에 비해 훨씬 컸다. 한국은 근속연수가 1년 증가할 때 임금이 약 2% 오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약 0.8%), 일본(약 1%), 독일(약 1%)에 비해 2배 이상 높았다. 박윤수 교수는 “한국은 주요국에 비해 근속연수에 대한 보상이 두 배 이상 크고 인지능력에 대한 보상은 3분의 1 정도로 작다”며 “한국은 미국·일본·독일에 비해 개인의 능력보다는 대규모 사업장에서 오래 근속한 것에 대한 임금 보상이 컸다”고 설명했다.
과도한 연공서열제도 마찬가지다. 대다수 정규직 일자리의 경우 호봉제를 바탕으로 해고가 어려운 고용구조를 갖고 있다. 이 같은 경향은 대기업일수록 더 뚜렷하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2022년 기준 500인 이상 사업장의 평균 근속연수는 11.2년으로 5~29인 사업장(5.8년)의 두 배 수준이었다. 대기업의 고용 안정성이 훨씬 높다는 뜻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한 번 비정규직 시장에 진입한 근로자가 정규직으로 전환되기도 더 힘들어지고 있다. 유경준 국민의힘 의원과 권태구 한국기술교육대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2006년 비정규직 가운데 2007년 정규직으로 전환한 비율은 18.9%였지만 2020년 비정규직 중에서는 10.1%만이 1년 뒤 정규직으로 채용됐다. 한요셉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율이 낮아지고 있다는 것은 노동시장 이중구조가 강해지고 있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며 “이 같은 현상은 사회이동성 측면에서도 부정적”이라고 지적했다.
이 같은 상황을 고려하면 노동 개혁은 더 미룰 수 없는 과제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얘기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총선 이후 노동 개혁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려고 했다”면서도 “노동 개혁은 더 이상 넘어갈 수 없는 문제로 정부와 여야가 힘을 모아 개혁 방안을 만들어야 할 것”이라고 요청했다.
실제 높은 노동 경직성은 생산성 하락으로 이어지고 있다. 박우람 숙명여대 교수와 백지선 KDI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지난해 말 발간한 ‘기업의 인사관리 특성과 경제위기 시 기업의 성과’ 논문에서 탄력근로제·성과급제·연봉제·성과배분제 등을 운영한 기업의 경우 코로나19에 따른 고용 충격이 오히려 더 작았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노동 경직성이 높은 국가일수록 경제위기 상황에서 대규모 실직이 발생할 수 있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정부 안팎에서는 총선 이후 정치권이 노동 유연성 확보를 기본 뼈대로 잡고 노동시장 이중구조 문제를 풀어나갈 필요가 있다는 조언이 나온다. 특히 저성장이 굳어지면서 기업 생존 측면에서도 유연성 확보가 더 중요해졌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허재준 한국노동연구원장은 “과거에는 성과급 조정 등을 통한 임금 유연성만으로도 경영이 가능했지만 앞으로는 임금·고용 유연성을 함께 높일 수 있는 방향을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 한 연구위원은 “일부 공공기관에서 시행되고 있는 직무급제를 민간으로 확대해야 한다”며 “비정규직 고용 안정성 확보 장치를 병행하는 한편 전반적으로는 노동을 유연화하는 방향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짚었다.
대기업 월급 524만원일때 중소기업은 308만원
노동시장 이중구조 문제를 따질 때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대·중소기업 임금격차다. 사회 초년생 때의 대기업 취직 여부에 따라 평생의 임금 수준이 결정된다는 인식 때문이다. 하지만 중소기업 임금이 대기업의 60% 수준에 머무르는 국면이 장기간 이어지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노민선 중소벤처기업연구원 연구위원이 고용노동부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2022년 기준 5~499인 중소기업 근로자의 평균 연봉은 3691만 원이었다. 500인 이상 대기업(6289만 원)의 58.7% 수준에 불과하다. 중소기업에서 한 달 평균 308만 원의 월급을 받을 때 대기업에서는 524만 원을 받아간다는 뜻이다.
대·중소기업 사이의 임금격차는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2022년 대기업 대비 중소기업의 임금 비율은 전년(60.5%)에 비해 1.8%포인트 감소했다. 10년 전인 2012년(61.1%)과 비교해도 2.4%포인트 악화됐다. 노 연구위원은 “대·중소기업 간 임금격차는 최근 10년간 더 심해졌다”며 “2022년도 이후 코로나19 회복 국면에서 임금격차가 더 커진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했다.
대·중소기업 임금격차 확대로 노동시장 이중구조가 심해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대·중소기업 간 노동시장 이중구조 심화는 사회이동성을 떨어뜨리는 문제도 있다는 말까지 있다. 연공서열제가 강한 한국에서는 한번 중소기업에 취직하면 대기업 노동시장에 진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노동교육해야 교육도 개혁한다
노동 개혁과 교육 개혁이 한데 묶여 있으며 교육 개혁을 위해서는 노동 개혁이 선행돼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노동시장에서 능력보다 학벌을 우선시하는 풍조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교육 개혁이 성공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12일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사교육비 총액은 재작년보다 4.5% 늘어난 27조 1000억 원으로 집계됐다. 2021년 23조 4000억 원을 기록한 후 3년 연속 최고치를 경신했다.
이 중에서도 대학 입시와 관련이 깊은 고등학생 사이에서 사교육비 지출이 두드러진다. 사교육을 받는 고등학생은 1인당 74만 원을 온라인 강의와 학원 등에 지출했다. 중학교(59만 6000원)와 초등학교(46만 2000원)에 비해 지출 규모가 훨씬 컸다. 특히 대치동 등 학원가가 밀집해 있는 서울의 경우 고등학생 1인당 사교육비가 98만 8000원으로 100만 원에 육박했다.
학계에서는 한국에서 이처럼 사교육비 지출이 두드러지는 이유가 노동시장에 있다고 본다. 한국 노동시장에서는 능력보다 학벌이 첫 직장을 결정하는 데 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동철 KDI 원장은 “학부모들이 사교육에 매달리는 것은 특정 학교와 전공이 취업에 유리하기 때문”이라며 “교육 개혁을 위해서는 노동 개혁을 함께할 필요가 분명히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 현재와 같이 대·중소기업과 정규·비정규직 사이에 임금격차가 큰 구조에서는 더더욱 양질의 정규직에 들어갈 때 유리한 학벌을 취득하는 것이 더욱 중요할 수밖에 없다는 진단이 나온다. 박윤수 교수는 “한국 특유의 교육열도 노동시장 진입기가 중요한 한국적 현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석했다. 한 국책연구기관 관계자는 “노동 개혁 없이는 교육 개혁이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구조에서는 학벌과 좋은 직장의 대물림이 고착화할 수밖에 없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실제 소득수준이 높을수록 사교육비 지출도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 통계청에 따르면 월평균 소득이 800만 원 이상일 경우 1인당 월평균 사교육비는 67만 1000원으로 300만 원 미만(18만 3000원)보다 3배 이상 많다. 사교육비 지출은 학생 성적과도 상관성이 높다. 성적 상위 10% 이내의 경우 사교육비가 61만 6000원으로 하위 20% 이내(33만 6000원)의 두 배 수준이었다. 교육 지출 여력이 높은 고소득층일수록 사교육비 투자를 늘려 좋은 학벌을 취득하고 이후 취업 시장에서도 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뜻이다. 더구나 가구 소득의 3분의 2가 노동 소득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높은 학력을 바탕으로 대기업에 취업한 사람이 자녀에게도 사교육 투자를 할 여력이 크다는 해석 또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