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이 지난달 유럽 주요국 정상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다자 회의체 ‘뉴클리어에너지서밋’에서 “원자력발전소의 안전한 가동을 연장하는 것은 청정에너지원을 대규모로 확보하기 위한 가장 저렴한 방법”이라고 밝혔다. 러시아의 천연가스 공급 중단으로 애먹은 EU가 원전으로의 회귀를 공식화한 순간이다. 파티 비롤 국제에너지기구(IEA) 사무총장도 “원자력의 지원 없이는 기후 목표를 제때 달성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글로벌 움직임과 달리 한국은 제22대 국회의원 선거가 야당의 압승으로 끝나면서 되레 원전 축소와 재생에너지의 과도한 확대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다. 당장 2035년까지 태양광과 풍력 등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을 40%까지 끌어올리겠다는 더불어민주당의 ‘재생에너지 3540’ 공약이 에너지 당국 입장에서는 발등의 불이다. 전문가들은 정치권이 정교한 분석 없이 내놓은 공약을 그대로 밀어붙이기보다는 안정적인 에너지원 확보와 인공지능(AI), 첨단 반도체 같은 신산업 수요를 충당할 수 있는 ‘에너지원 믹스’를 고민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18일 산업통상자원부와 정치권에 따르면 문재인 정부 시절 수립 작업을 시작해 윤석열 정부에서 확정한 ‘제10차 전력산업기본계획’상 2036년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은 30.6%다.
하지만 민주당의 공약은 이보다 10%포인트나 높다. 원내 제3당이 될 조국혁신당은 재생에너지 비율을 2030년 30%, 2050년 80%까지 확대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정부 안팎에서는 이를 두고 사실상 달성이 불가능한 수치라는 지적이 나온다. 우종률 고려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우리나라 여건상 무작정 재생에너지 설비를 설치했다고 해서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며 “무리하게 재생에너지 설비만 늘리는 것보다는 전력 계통을 연결하는 한편 에너지저장장치(ESS)를 확충하는 데 선제적으로 투자해야 한다”고 말했다.
에너지 업계에서는 야당의 공약이 현실화하더라도 전기요금 급등이 불가피하다고 강조한다. 이에 대한 설명 없이 재생에너지 발전을 늘리는 것은 문제가 크다는 것이다. 유승훈 서울과학기술대 창의융합대학 학장은 “국내에서 이런저런 수단들을 총동원해도 달성하기 어려운 수치들”이라며 “가능하려면 엄청난 비용 증가를 수반하는데 이에 대한 얘기는 쏙 빼놓았다. 당장 전기요금이 엄청 올라갈 텐데 국민 부담이 늘어나는 것에 대해 정확하게 설명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한국원자력학회가 2021년 발표한 ‘에너지믹스 보고서’에 따르면 2050년 재생에너지 비중을 80%로 확대해도 탄소 중립을 이룰 수 없는 데다 2050년 전기요금은 2019년 대비 91~123%의 인상 요인이 발생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국민 1인당 추가 부담금은 85만~200만 원에 달한다는 계산이다. 2019년 연간 전기요금은 1인당 98만 원에 불과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대학교수는 “야당의 재생에너지 목표는 걷지도 못하는데 뛰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며 “(정치권이) 실현 불가능한 목표를 달성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하달하다 보면 경제성 조작이 재발하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토로했다.
전문가들은 지금은 원전 비중을 유지·확대해야 하는 시기라고 지적했다. 경제안보 측면 이외에도 늘어나고 있는 AI용 서버와 데이터센터 수요를 감안하면 혁신형 소형모듈원전(SMR) 같은 차세대 원전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국제사회 또한 하나둘 탈원전 기조를 포기하고 게임체인저로 불리는 SMR 도입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지금까지 탈원전에 앞장서온 유럽 국가들과 일본도 원전 복구 대열에 합류했다. 일본은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 직후 멈춰 선 오나가와원전 2호기를 13년 만에 재가동할 예정이다. 스웨덴 정부는 지난해 8월 “기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향후 20년간 전력수요가 두 배로 늘어날 것”이라며 “이를 위해 2045년까지 최소 10기의 재래식 원전과 SMR이 다수 건설돼야 한다”고 발표했다. 1980년 국민투표에서 원전을 단계적으로 폐기하기로 결정한 후 43년 만에 내린 결단이다. 유 교수는 “탄소를 줄이는 게 중요한 것이지 수단은 기술 중립적이어야 한다”며 “태양광과 풍력만 강조하는 것은 우리나라에 바람직하지 않으며 원전을 포함한 다양한 에너지원을 섞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 교수 역시 “앞으로 환경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데다 원전은 잘하고 있으니 계속 해나가야 한다는 의미”라며 “원전은 같이 가지고 가야 하는 에너지원”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