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렬했던 총선이 끝나고 진한 여운이 오래 남아 있다. 승리한 정당은 압승의 환희에 들떠있고 패배한 정당은 책임 논쟁으로 시끄럽다. 대통령은 여야 양쪽에서 수용할 총리 후보를 물색하느라 고심하고 있다. 막강한 국회 권력을 거머쥔 거대 야당의 공세가 예상되며 정책 불확실성이 커지자 정부 부처와 공공 기관은 현안 대응에 손을 놓고 있다.
이 와중에 민생 경제는 방향타를 잃고 갈팡질팡 흔들리며 좌초 일보 직전에 놓여 있다. 특히 물가 상승이 거세지며 가계에 치명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소비자물가지수는 올해 들어서도 3% 대의 상승률을 이어가며, 신선식품 물가 상승률은 20%대로 급등했다.
코로나19 바이러스처럼 인플레이션이 퍼지자 신조어가 유행한다. 사과를 위시한 과일값 급등을 칭하는 ‘프루트 플레이션’, 프랜차이즈 치킨 가격이 상승한다는 ‘치킨 플레이션’, 밀가루·계란 가격 상승으로 빵값이 계속 오르는 ‘빵 플레이션’, 우유 가격의 지속적 인상을 의미하는 ‘밀크 플레이션’, 국수 음식 가격의 상승을 뜻하는 ‘누들 플레이션’, 직장인들의 점심값 지출이 증가한다는 ‘런치 플레이션’ 등등. 인플레이션이 민생 곳곳에 깊숙이 파고들며 파생된 유행어를 열거하면 끝이 없다. 흥미롭게 이런 인플레이션 신조어는 대부분 먹거리와 관련된다.
한국인은 먹고사는 문제에 민감하다. 그러니 먹거리 물가 상승은 심각한 민생고이다. 지난 총선에서 여당의 참패에 일조한 ‘대파 가격’ 논란이 왜 그리 심각한 파장을 불러일으켰는지 잘 생각해 보라.
대파 한 품목의 가격이 문제가 아니다. 대파로 상징되는 먹거리 가격의 상승이 문제이다. 대파 가격이 싸다는 둥, 한 단이 아니라 한뿌리 가격이라는 둥의 말장난은 먹거리 물가에 시달리는 국민을 서글프고 화나게 만든다.
총선 유세에서 대파를 흔들어 대며 여당을 비웃고 공격한 야당 정치인들도 마찬가지이다. 법카로 초밥도 사 먹고 코인 투자로 수억원을 벌어들이며 불법 대출로 강남 아파트에 투기한 본인들은 민초들의 생활고를 얼마나 알기나 할 것인지. 대파 가격을 잘못 거론해 민생에 무지하다는 사실이 탄로 난 여당을 비판만 할 것이 아니라 대파를 비롯한 장바구니 물가를 내리기 위해 야당은 무엇을 노력했는지 반성해야 한다.
국정에 관한 여야 협치를 논의하기 위해 곧 대통령과 야당 대표가 만난다고 한다. 그런데 야당이 주장한 민생회복지원금 25만원을 의제에 넣느냐 마느냐를 놓고 벌써 힘겨루기가 벌어지고 있다.
정말로 한심하고 치졸하다. 전 국민에게 25만원을 살포하는 현금성 지원금이 포퓰리즘이냐 아니면 내수활성화 마중물이냐 하는 논란을 떠나 사소하고 쫀쫀하다.
이 정부 들어와 대통령과 야당 영수가 최초로 만나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는 최우선 과제가 기껏 국민 1인당 25만원짜리 밖에 안된다는 말인가.
여당과 야당의 총선공약집을 살펴보면 그것보다 훨씬 더 크고 거창하며 중요한 정책이 많다. 국민의힘 총선 공약집은 ‘새로운 변화 내 앞으로’라는 제목으로 ‘민생 활력, 새로 희망’을 내세운다. 더불어민주당의 공약집은 ‘삶의 질, 수직 상승을 위한 민주당의 약속’이라는 제목을 걸고 ‘국민 모두가 전 생애에 걸쳐 건강과 안전, 소득과 주거 등 모든 영역의 기본적인 삶이 보장되는 국가’를 만들겠다고 약속한다.
그런데 실제 총선 유세에서 공약집에는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정책 토론회도 없었고 언론도 공약에 관심두지 않았다. 그러니 대다수 국민은 각 정당의 총선공약집이 있는지조차도 모르고 넘어갔다. 여야가 서로를 비난하는 심판론만 부각되었을 뿐이다. 민생공약으로 주목받은 것은 야당의 25만원 민생지원금이 유일하다. 참 상상력이 빈약하다. 뭐 현대판 고무신 쪼가리도 아니고. 거창한 협치를 논의하는 여야 영수회담에서 조금 더 큰 민생 과제가 의제로 다뤄지기 바란다. 민생을 위한다며 지원금을 얼마 줄 것인지만 논의하는 영수회담은 역사적으로 가장 초라한 협치로 기록될 것이다. 기왕 여야가 협력하여 국민들에게 돈을 뿌릴 바에는 돈 쓸 맛 나게 10배로 늘려야 통 크다는 소리나 들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