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수 개월 동안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사법 리스크를 다룬 언론보도는 4차례 기소된 전임 대통령의 자아도취 성향을 오히려 증폭시켰다. 그는 자신이 처한 정치적 위기를 ‘2024 대선 캠페인’의 호재로 뒤바꿔 재집권 가능성을 높이려 한다.
지난해 8월 뉴욕타임스는 공화당 대선후보 지명전에서 트럼프가 승리한 것은 그에게 적용된 숱한 범죄혐의가 정치적 자산으로 바뀌는 ‘전도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전임 대통령이자 차기 대권주자에게 꼬리표처럼 달라붙은 4건의 기소는 언론의 관심을 끌어모으기에 부족함이 없다. 반면 언론의 셀프 패러디로 인해 모든 기사는 조 바이든 대통령에게 해가 된다. ‘바이든 캠페인의 최대 악재는 트럼프’라는 로이터통신 기사는 이같은 현상을 정확히 짚어준다. 트럼프 재판으로 피고가 아닌 바이든이 어려움을 겪는다는 얘기다.
얼마전 PBS뉴스아워는 뉴욕법원에서 열린 트럼프의 ‘세금사기’ 의혹 재판을 보도했다. “이번 재판은 트럼프가 자신이 짊어진 사법리스크를 얼마나 교묘하게 캠페인의 호재로 활용하는지를 유감없이 보여줄 것이다. 그는 4건의 기소를 자신의 선거운동을 방해할 목적으로 바이든 진영이 치밀하게 조율해 만들어낸 흠집내기 시도로 규정하고, 이를 자신의 지지기반을 다지고 선거자금을 모금하는 새로운 수단으로 적극 활용할 것이다.”
이처럼 트럼프 친화적인 전망에도 전임 대통령은 대출사기 의혹을 다룬 뉴욕지법 민사재판에서 천문학적 액수의 벌금과 함께 2건의 법정모독 벌금형을 선고받았고, 보석금을 마련하기 위해 진땀을 흘려야 했다. 만약 어렵사리 법원에 제출한 보석채권에 하자가 발견되면 곧바로 자산압류조치가 떨어질 수 있다. 언론의 예상과 달리 트럼프는 뉴욕 민사재판 결과를 정치적 자산으로 전환하는데 실패한 듯 보인다. 패소한 트럼프는 부동산 거부가 아니라 이미 수 년전 도산한 카지노 운영자를 떠올리게 한다.
뉴욕 민사재판에 이어 맨해튼 지방법원의 형사재판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언론은 트럼프가 사상 초유의 재판에 쏠리는 관심을 선거운동의 원동력으로 역이용할 것으로 내다봤다. 하지만 그들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실제로 형사재판이 시작되자 허구의 자리에 현실이 들어섰다. 그는 재판절차에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법원 출석을 지렛대로 활용해 지지자들을 규합하며 그 어떤 법원도 자신을 붙잡아둘 수 없다는 점을 과시하려 했다. 하지만 정작 재판이 시작된 이후 그는 나날이 초췌해지고, 나이 들고, 솔직히 다소 처량해 보이기까지 한다.
법정은 트럼프가 아닌 판사가 관할하는 영역이다. 트럼프는 지난주 ‘성추문 입막음 돈’ 형사재판을 담당하는 후안 머천 맨해튼 지법판사로부터 배심원 협박에 관한 훈계를 들었다. 머천 판사는 피고석에 앉은 트럼프에게 재판에서 배제돼 법정 밖으로 나가는 배심원을 향해 상대가 들을 수 있는 코멘트를 하거나 자신의 뜻을 전달하는 손 동작을 취해선 안된다며 엄포를 놨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보좌관이었던 데이비드 악셀로드는 트럼프의 옹색한 처지를 이렇게 요약한다. “법정에서 그는 한낱 형사피고인에 불과하다. 그곳의 절대적인 권력은 트럼프가 아닌 다른 사람이 쥐고 있고, 그에겐 엄격한 룰이 적용된다. 법정 스케치가 포착한 트럼프의 지치고 무력한 모습은 작고한 그의 부친이 생전에 그토록 혐오했던 유형의 인간이 바로 자신이 아닐까 하는 두려운 각성마저 엿보게 한다. 그게 도대체 어떤 유형의 인간일까? 기소된 형사범일까? 아니 그보다 한층 혐오스런 존재, 바로 패배자(loser)다.”
트럼프는 잘 맞는 옷처럼 편안한 ‘언터처블’의 특별한 지위와 힘을 매일 조금씩 잃어가고 있다. 트럼프 자신은 물론 일부 보수 언론 매체들도 일단 재판이 시작되면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현실은 여전히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한 가지 사실을 잊은 듯 보인다. 전직에 상관없이 법정에 선 트럼프는 그저 평범한 형사피고인일 뿐이다.
재판은 이제 막 시작됐다. 하지만 판사의 치욕적인 훈계와 반복적으로 거론되는 기나긴 혐의 내용은 이미 그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트럼프의 분노 발작이 그가 처한 딜레마를 더욱 극명하게 드러낸다는 점이다. 최악의 악몽 한 가운데서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자기도취자라면 저렇게까지 초라하고 지치고 맥빠지게 보이진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