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밸류업 프로그램 가이드라인이 상법이 정한 감사위원 분리 선출제를 우회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 놨습니다.”
권재열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8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권 교수는 “감사위원 분리 선출제는 도입 당시 재산권 침해 논란이 많았음에도 ‘소액 주주 권리 보호’, ‘거버넌스(지배구조) 투명성 제고’라는 대의 명분이 있어 정당성이 인정됐다”며 “가이드라인은 이러한 명분을 들이밀기 어려운 중소기업에까지 분리 선출제를 강요할 수 있도록 악용할 여지가 있다”고 비판했다.
2020년 상법 개정으로 도입된 감사위원 분리선출제는 자산 규모가 2조 원 이상인 대규모 상장사로 하여금 감사위원이 될 이사 가운데 최소 1명을 다른 이사들과 분리해서 뽑도록 하는 제도다. 상법은 주주총회서 감사나 감사위원을 선임할 때 대주주가 행사할 수 있는 의결권을 3%까지만(3%룰) 인정한다. 분리 선출제 도입 이전에는 감사위원 후보를 대주주가 선임한 이사 중에 뽑도록 해 3%룰이 사실상 제기능을 못한다는 논란이 잇따랐다. 이사를 선출할 때는 대주주의 의결권 제한이 없어서 대주주가 자신에게 적대적인 후보를 사전에 제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권 교수는 2022년부터 국민연금 수탁자 책임 전문위원회로 활동해오고 있다. 금융 당국의 밸류업 프로그램 토론회에도 참여하는 등 기업 지배구조와 관련해 목소리를 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문제 삼는 대목은 가이드라인에서 “감사위원의 분리 선출을 통한 감사 독립성 강화도 (주주·시장 참여자와 소통할 수 있는) 좋은 예시로서, 기업은 감사위원 분리 선출 현황과 향후 계획 등을 밝힐 수 있다”, “지배구조보고서 의무공시 대상기업이 아닌 경우에도 가이드라인을 참고해 기업 가치제고를 위해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지표들을 기재할 수 있다”고 명시한 부분이다. 현 제도는 자산 규모가 2조 원 이상인 기업에만 지배구조보고서를 의무 공시하도록 하고 있는데, 이보다 영세한 기업에까지 분리 선출을 강제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권 교수는 “특히 경영권 방어가 어려운 중소기업들은 행동주의 펀드를 포함한 소액 주주 몇몇이 뭉쳐 연구개발(R&D)을 위한 현금 곳간을 빼가는 등의 ‘먹튀’에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며 “가이드라인이 상법을 우회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법률적으로도 맞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기업이 (기업가치 제고 계획을) 자율적으로 정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사실상 주주와 시장의 압력에 의해 강제될 가능성이 크다”고 덧붙였다.
권 교수는 가이드라인에서 지배 주주나 특수관계인이 비상장 개인 회사를 보유한 내역을 공개할 수 있도록 하는 대목에 대해서도 우려를 드러냈다. 그는 “우리나라는 벤처 투자 자금이 대기업으로부터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 이를 모두 공개하라고 하면 경영 전략 유출, 지나친 주주환원 우려로 벤처 자금이 경색될 수 있다”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