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반도체 산업에 총 26조 원 규모의 지원 프로그램을 가동한다. 금융, 세제, 인프라, 연구개발(R&D) 등을 지원해 반도체 산업 경쟁력 강화에 나선다. 1조 원 규모의 ‘반도체 생태계 펀드’가 조성되고 시스템반도체 경쟁력 제고 대책도 마련된다.
윤석열 대통령은 23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반도체 산업을 주제로 제2차 경제이슈점검회의를 주재하며 “반도체 산업이야말로 민생을 더 풍요롭게 하고 경제를 도약시키는 가장 중요하고 확실한 토대”라며 “26조 원의 반도체 산업 종합 지원 프로그램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윤 대통령은 참석한 장관 등에게 “각국은 반도체에 국가의 운명을 걸고 배수진을 치고 산업 전쟁을 벌이고 있다”며 “경쟁국에 뒤지지 않게 총력 지원 태세를 갖춰달라”고 주문했다.
세부적으로 금융 부문에는 17조 원의 반도체 금융 지원 프로그램이 신설된다. 윤 대통령은 “(반도체) 기업들이 공장 신축이나 라인 증설 등 설비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다 보니 유동성 문제가 발생한다”며 “산업은행 지원 프로그램으로 어려움이 많이 해소될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 만료되는 투자세액공제도 일몰 시한을 연장할 방침이다.
인프라 부문에서는 반도체 클러스터를 뒷받침할 전기·용수·도로 등을 정부가 책임지고 빠르게 조성한다. 윤 대통령은 “시간이 보조금이고 문제 대응 속도가 가장 중요하다”며 “송전선로 건설 기간을 대폭 단축하는 국가전력망 특별법이 국회에서 조속히 통과될 수 있도록 국회와의 협의도 강화해달라”고 당부했다.
우리 반도체 산업의 약점으로 지적되는 반도체 설계 전문 기업인 팹리스나 소재·부품·장비 기업을 육성하기 위해 1조 원 규모의 반도체 생태계 펀드도 조성된다. 시스템반도체에 대해 윤 대통령은 “경쟁력을 강화하는 획기적인 방안을 내달라”고 산업통상자원부에 주문했다.
윤 대통령은 “반도체가 곧 민생”이라며 “반도체 세제 지원으로 기업 투자가 확대돼 수익이 늘면 일자리를 더 많이 누려 민생이 살아나고 세수도 증가한다”고 강조했다.
산은에 최대 1.5조 출자해 저리 대출…"보조금은 없어 한계"
정부가 23일 발표한 ‘반도체 생태계 종합 지원 방안’의 핵심은 윤석열 정부 임기 내에 반도체 산업에 18조 1000억 원 규모의 자금을 공급하겠다는 것이다. 특히 산업은행에 1조 원 이상을 출자해 반도체 산업 투자에 17조 원의 저리 대출을 제공하는 게 뼈대다. 지원 규모를 확대하기는 했지만 ‘반도체 대기업의 자금은 정책금융과 세제를 중심으로 지원한다’는 방침은 그대로 유지했다는 평가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최근 반도체 산업 지형이 급격히 변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보조금 지급 등 보다 적극적인 대책이 필요했다는 의견이 나온다.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이날 정부서울청사에서 언론 브리핑을 열고 “산은에 출자하는 식으로 기업들에 상당한 인센티브가 될 정도의 대출을 제공할 계획”이라며 “투자 보조금까지는 아니더라도 저리 대출로 유동성을 지원받을 수 있는 방안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정부 관계자는 “일단 정부가 산은에 출자하면 산은이 이를 토대로 산업금융채권(산금채)을 발행하는 식으로 자금을 조달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시장에서는 정부의 산은 출자액이 최소 1조 원에서 최대 1조 5000억 원 수준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이미 정부는 올해 산은과 기업은행·신용보증기금을 통해 반도체 설비·연구개발(R&D)에 3조 6000억 원의 정책금융을 지원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 최 부총리는 이번에 발표한 17조 원 저리 대출에 대해 “기업들과 소통하면서 ‘그 정도면 상당히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저희가 확인을 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산은 출자를 통한 자금 지원은 한계가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각 기업별 대출 한도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SK그룹의 산은 대출 한도가 거의 차 있어 산은에 단순히 출자하는 방식으로 자금을 지원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효과가 낮을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일각에서는 다음 달 산은의 기업별 한도 관리 등에 대한 정부의 언급이 있을 것이라는 관측도 제기된다. 산은 대출을 비롯해 정책 지원 중 70~80%를 중소기업에 투입하겠다고 밝힌 것도 대규모 설비투자보다는 팹리스(설계)나 소재·부품·장비 중소기업 육성에 초점을 맞춘 대책이라는 의미라는 해석도 있다.
이날 정부는 세액공제 중심의 인센티브를 확대한다는 방침도 명확히 했다. 현재 한국은 반도체 설비·시설 투자에 15%(대기업 기준)의 세액공제를 제공하고 있다. 이번 대책에는 △국가전략기술 세액공제 적용 기한 연장 △반도체 R&D 세액공제 적용 범위 확대 등이 포함됐다.
이는 한편으로 ‘보조금보다는 세액공제가 합리적’이라는 정부의 기존 입장을 재확인한 것이다. 실제로 이날 정부는 보조금 지급에는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최 부총리는 “제조 시설을 새로 만드는 나라들이 인센티브를 주기 위해서 투자 보조금을 지급한다”며 “우리는 제조 시설을 위한 세제 지원이 보조금과 거의 같은 성격이라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최근 반도체 시황이 급변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보조금이나 세액공제 환급 등 보다 적극적인 방안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일단 인텔과 마이크론·TSMC 등이 미국과 일본에 반도체 공장을 완공하고 제품을 양산할 2030년 이후에도 한국이 메모리반도체 시장에서 압도적인 생산 점유율을 유지할 수 있겠느냐는 우려가 제기된다. 최근 삼성전자가 반도체 사업을 총괄하는 디바이스솔루션(DS) 부문장에 전영현 부회장을 전격 선임한 것도 반도체 업황이 급격히 바뀌고 있다는 방증이라는 해석이다.
TSMC 등을 필두로 압도적인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는 대만처럼 정책 당국이 직접 ‘반도체 산업이 경제의 핵심’이라는 메시지를 명확히 내야 한다는 의견 또한 있다. 이달 20일 취임한 라이칭더 대만 총통은 취임사에서 “지금의 대만은 반도체 선진 제조 기술을 장악해 인공지능(AI) 혁명의 중심에 서 있다”며 “글로벌 AI화 도전에 직면해 우리는 반도체 칩 실리콘 섬의 기초 위에 서서 전력으로 대만이 AI 섬이 되도록 추동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반도체 업계의 한 고위 관계자는 “정부가 업계와의 소통에 적극적인 만큼 세부적인 대책이 나오는 6월까지 기다려봐야 할 것”이라면서도 “반도체 보조금 지급 등 적극적인 대책이 나올 필요가 있다”고 해석했다.
도로·용수에 2.5조, R&D·인력엔 5조 투입
이와 함께 정부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을 위한 도로·용수·전력 인프라 지원에 2조 5000억 원을 투입하기로 했다. 연구개발(R&D)과 인력 양성에도 5조 원 이상을 투입한다.
최 부총리는 “반도체 메가클러스터의 신속한 조성을 위해 도로·용수·전력 등 인프라 지원을 강화하겠다”며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속도를 획기적으로 올릴 것”이라고 밝혔다.
구체적으로는 인프라 구축에 2조 5000억 원을 투입할 계획이다. 정부 관계자는 “인프라 마련에 시간이 걸리는 만큼 2조 5000억 원이 언제까지 투입된다고 딱 잘라 말할 수는 없다”고 전했다.
2조 5000억 원에는 국고는 물론이고 한국수자원공사나 한국도로공사 등 공공기관의 지출 또한 포함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들 기관은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의 시설 운영 등도 맡게 된다. 한화진 환경부 장관은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서 용수를 함께 공급할 수 있는 공동 사용 관로를 설치하려 한다”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수자원공사가 설치해 운영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정부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과정에서 개발계획 수립과 토지 보상을 동시에 추진해 착공에 소요되는 기간을 3년가량으로 줄이겠다고도 했다. 산업단지가 착공에 들어가기까지는 통상 7년이 걸린다. 최 부총리는 “기간을 절반으로 단축하는 것도 일종의 시간 보조금”이라고 해석했다.
이와 함께 정부는 향후 3년간 반도체 R&D와 인력 양성 부문에 5조 원 이상을 투입하기로 했다. 기존 3조 원에서 증액한 것이다. 이를 통해 2만 2000명 이상의 반도체 인력을 양성할 방침이다. 최 부총리는 “반도체 관련 첨단 패키징과 미니 팹 구축 등 R&D 사업 예비타당성조사를 조속히 마무리하고 그 결과에 따라 2025년 예산안에 반영할 계획”이라며 “반도체 특성화대학 등 대학원 과정을 확대해 현장 수요에 맞는 전문인력도 집중 양성하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