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여명] 금리인하 논의, 과속 말아야

근원물가 하락에 통화정책 완화론 비등

정부 가격개입 빼면 실제 물가 더 높아

섣부른 금리인하 더 큰 비용 치를 가능성

부동산·환율 변수 커 신중히 접근해야

김영필 경제부장김영필 경제부장




아서 번즈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이 1973년 10월 4차 중동전쟁이 터지면서 원유 값이 치솟자 연준에 지시를 하나 내렸다. 석유와 에너지 관련 제품을 소비자물가지수(CPI)에서 빼라고 한 것이다. 당시 배럴당 2.9달러였던 국제유가는 2~3개월 만에 4배가량 치솟았다. 직원들은 반발했다. 번즈는 “일시적인 공급 문제이기에 인플레이션의 기저 흐름을 보여주지 못한다”고 했지만 석유와 에너지는 CPI의 11%를 차지했다.



번즈는 한 술 더 떴다. 식품 가격이 급등하자 1972년의 엘니뇨(동태평양의 바다 온도 상승)를 지목했다. 엘니뇨가 비료와 사료 가격을 높였고 이것이 돼지고기와 쇠고기·닭고기 값을 뛰게 했다는 논리였다. 연준은 식품 가격을 CPI에서 뺐다. 식료품의 CPI 비중은 25%였다. 그렇게 당국자들이 애용하는 근원물가가 탄생했다.

성태윤 대통령실 정책실장이 16일 근원물가를 대중 앞에 소환했다. 그는 “근원물가가 2%대 초반으로 다시 내려와 있어 안정적”이라며 “기준금리를 인하할 수 있는 환경이 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5월 국내 근원 소비자물가는 2.2%다. 한국은행의 물가 목표가 2%니까 근처까지 왔다. 자영업자 대출 연체율이 12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하고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로 금리 인하가 필요한 시점에서 반가운 소식이었을 터다.



문제는 누구도 근원물가로 생활할 수 없다는 점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가구당 월 평균 지출에서 식료품과 각종 연료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약 22.8%다. 근원물가는 당국자들의 머릿속에 있을 뿐 현실은 다르다. 사과와 대파가 4월 총선의 희비를 갈랐다는 분석이 허투루 나온 게 아니다. 국민들이 느끼는 높은 물가와 팍팍한 삶은 근원물가가 아니라 에너지와 식품 가격을 포함한 헤드라인 물가다. 인플레이션을 감안한 실질 임금만 해도 8개 분기째 마이너스다. 2000만 월급쟁이들은 앉아서 돈을 까먹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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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도 이를 모르지 않는다. 대통령실의 낙관과 달리 기획재정부는 유류세 인하 조치를 2개월 연장했다. 인하율은 낮췄지만 연장에 방점이 찍혀 있다. 물가가 안정적이라면 ‘세수 먹는 하마’인 유류세 인하부터 중단해야 옳다.

가격 개입도 마찬가지다. 이달부터 지원액을 줄인다지만 정부는 과일 값 안정에 2000억 원 안팎의 예산을 투입했다. 식품 업체 팔을 비틀어 가격 인상도 막았다. 정부 개입은 전방위적이어서 CJ나 동원 같은 식품 기업부터 롯데리아 같은 패스트푸드 업체, 배달 3사까지 관여했다. 한국전력 같은 공공기관은 요금 인상을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얻은 물가가 5월 기준 2.7%(농산물·에너지 포함), 근원물가 2.2%다. 정부 입장에서는 서운하겠지만 화장을 지운 실제 물가는 이보다 훨씬 높을 것이다.

다시 번즈 얘기로 돌아가면, 그는 인플레이션을 잡지 못한 역사상 최악의 연준 의장이 됐다. 근원물가라는 도구를 만들었지만 리처드 닉슨 대통령을 정치적으로 도우려던 번즈의 시도가 스태그플레이션(경기 둔화 속 물가 상승)을 불러오면서 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경기 후퇴를 맞았다. 번즈가 남긴 유산은 인플레이션과의 싸움에서 섣부른 통화정책 완화는 값비싼 대가를 치른다는 점과 정치적 독립의 중요성, 두 가지다.

지금은 금리와 관련해 따져봐야 할 것들이 많다. 집값이 오르고 있고 환율도 걱정스럽다. 외부 요인 역시 변수다. 미 대통령 선거 공화당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소득세를 낮추는 대신 관세를 인상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수입 관세가 100%까지 오를 수 있다는 말이 나온다. 래리 서머스 전 재무장관은 “지금까지 자신이 봐왔던 것 중에 가장 크게 물가 상승을 일으킬 경제정책”이라고 지적했다.

통화정책은 신중할 필요가 있다. 근원물가도 최소 3개월 정도 흐름을 지켜봐야 한다. 올 1~4월 2.3~2.5%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하반기에 1%대 중후반을 찍어야 연간 기준으로 2%다. 경기는 순환하고 금리 인하는 오게 돼 있지만 관련 논의는 이제 시작이어야 한다. 너무 늦어도 안 되지만 너무 빠른 금리 인하는 그동안의 성과를 단번에 무너뜨릴 수 있다.


김영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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