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사진인 줄 알았는데 아니야!”
올해 5월 열린 아트페어 ‘아트부산(Art Busan)’. 삼삼오오 모인 관람객은 한쪽 벽 전체를 가득 채운 벽화와 같은 그림 앞에서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높이만 3m에 이르는 커다란 그림 속에는 1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앳된 소녀의 모습이 담겨 있는데 소녀는 한 가지 단어로 설명할 수 없는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다. 처음 멀리서 소녀의 표정에 매료돼 부스 안으로 들어온 관람객은 커다란 작품의 크기에 압도돼 놀라고 이후 가까이 다가가 작품을 들여다보던 중 작품이 사진이 아니라 누군가가 손으로 직접 그린 그림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한번 크게 놀란다.
작품의 주인공은 40대 극사실주의 초상화가 강강훈이다. 작품 속 소녀는 다름 아닌 작가의 딸. 작가가 전속으로 있는 조현화랑은 최근 많은 국내외 아트페어에 그의 작품을 출품하고 있는데 그때마다 기자는 우연히 발견한 그림 앞에 멈춰 서서 한참이나 대화를 나누는 관람객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대개 비슷했다. “아이가 어떻게 저런 표정을 지었을까.” “어떻게 이렇게 큰 캔버스에 그림을 그렸을까.” “사진이 있는데 굳이 이렇게 실제 같은 그림을 그린 이유는 무엇일까.” 처음 강강훈의 작품을 본 기자의 궁금증도 다르지 않았다. ‘그림을 그리는 방법’과 ‘이런 그림을 그리는 이유’를 묻기 위해 부산 기장군에 위치한 작가의 작업실을 직접 찾았다.
우연히 만난 4m 층고의 작업실…'운명처럼 시작된 도전'
강강훈의 작업실은 타운하우스 마을에 있는 주택 안에 있다. 집 앞에 도착한 기자는 ‘작품을 세워두기에는 집의 층고가 좀 낮은 것 같은데’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작가가 최근 높이 3m에 이르는 대형 작품을 제작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같은 의구심은 작가가 기다리고 있는 지하 작업실에 들어서면서 모두 해소됐다. 차고를 개조한 작업실 벽의 높이는 작품을 몇 점씩 세워둘 만큼 충분히 높았다. 기자가 방문한 날 작가의 작업실에는 작품 대신 목조 구조물이 벽에 걸려 있었다. 이 구조물 상단에는 두루마리 휴지처럼 천을 둘둘 말고 펼칠 수 있는 장치가 달려 있었다. 작가는 “커다란 작품을 세워두고 그냥 사다리 위에 올라가 그림을 그리면 떨어질 수 있어서 목공 일을 하는 이웃의 도움을 받아 이 구조물을 제작했다”며 작업실 소개를 시작했다.
작가는 4년여 전 ‘가능하면 가장 큰 인물화를 그려보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작업실을 찾기 시작했다. 작품을 세워두려면 최소 층고가 3m 이상이어야 하는데 부산 어디에도 마땅한 곳이 없었다. 애만 태우던 중 모델하우스조차 없는 ‘팸플릿’으로만 확인할 수 있었던 지금의 작업실 집을 발견했다. 팸플릿 속 평면도에 표시된 지하 공간 층고는 무려 4.8m. 그는 “처음에는 믿을 수 없어 건설사에 연락해 몇 번을 다시 확인했다”며 “이후 아이들과 함께 지내면서 일까지 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라고 생각해 곧바로 집을 계약했다”고 말했다. 집을 발견한 것도, 구조물을 만들어준 이웃을 만난 것도 모두 ‘가장 큰 인물화를 그리겠다’는 그의 도전에 한발 더 다가갈 수 있는 귀한 우연이었다.
이별을 이해하는 12세 딸, 가족과 함께 여물어가는 그림
작가는 매일 눈을 뜨면 가장 먼저 지하로 내려와 미리 찍어둔 수백 장의 사진을 보며 그림을 그린다. 인물의 모습을 실제와 똑같이 그리는 것은 어떤 예술가에게나 어려운 일이지만 그려야 하는 대상이 ‘딸’인 강강훈에게 특히 고된 작업이다. 현재 12세인 그의 딸은 두 살부터 작가의 그림에 등장했다. 사실상 인생의 모든 기간 모델로 일한 셈이다. 작가는 월 1회 이상 이곳에서 딸과 함께 사진 촬영 작업을 진행한다. 그림을 실제와 똑같이 그린다고 해서 사진을 대충 찍어도 되는 것은 아니다. 감각적인 연출과 전문가 수준의 기술을 통해 극강의 결과물을 도출해야만 극사실주의라는 표현을 구사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 작가는 오랜 시간 직접 사진을 배우고 조명 등 장비를 들여 좋은 사진을 찍는 방법을 연구해왔다.
하지만 이 같은 기술적 환경보다 더 중요한 건 모델의 감정 상태다. 부녀는 하루 동안 수백 장의 사진을 찍는데 촬영의 핵심은 ‘고도의 디렉팅(지시)’이다. 아버지가 딸에게 자신의 감정 상태를 설명하고 이를 표정으로 표현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작업의 시작이다. 아이가 아버지의 감정을 자신의 얼굴로 보여주는 셈이다. 최근 그의 작품 속 딸은 옅은 슬픔의 표정을 하고 있다. 웃는 얼굴은 거의 없다. 작가는 “얼마 전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이후 저의 감정을 표현하다 보니 웃는 얼굴을 그릴 일이 별로 없었다”며 “아들이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과 이별의 슬픔을 아이에게 설명하고 아이가 표정과 포즈로 그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최근의 주된 작업”이라고 말했다.
12세 딸이 노모의 죽음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까. 작가는 “아주 어릴 때는 이해하지 못하고 시키는 대로 놀이처럼 따라했지만 지금은 점차 그 감정을 조금씩 알아가는 것 같다”고 했다. 딸이 성숙할수록 작품의 완성도는 높아지는 셈이다. 작가로서는 만족스럽지만 아버지로서 마냥 유쾌한 일은 아니다. 최근 작가는 아내로부터 돌아가신 할머니에 대한 아버지의 그리움을 표현하는 촬영을 한 후 딸이 크게 울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기도 했다. 작가는 “저의 목표는 오랜 시간 딸과 함께 작업해 가족의 이야기가 하나의 서사시가 되는 것이지만 그만두고 싶다고 말한다면 언제든 그것을 존중해줄 각오도 돼 있다”며 “딸과의 관계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것은 예술가로서 저의 삶에도 무척 중요한 과업”이라고 말했다.
사진보다 더 사실적인 그림…"효율성만 따지는 것은 과정에 불평등"
이쯤에서 다시 의문이 든다. 300호 이상의 대작을 그리는 데 걸리는 시간은 3개월 이상이다. 애써 찍은 수백 장의 사진을 또다시 몇 달에 걸쳐 실제와 똑같이 그리는 작업은 추상 일색인 현재의 미술 시장에서 효용성이 떨어지는 듯하다. 작가 역시 ‘사진이 있는데 굳이 왜 찍은 사진을 보고 그림을 그리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이에 대한 작가의 생각은 명확하다. 우선 그는 “저는 사진과 똑같이 그리는 것이 아닌 실제와 똑같은 그림을 그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대답했다. 사진은 실제를 그리기 위한 도구에 불과한 셈이다. 이어서 작가는 “사람들에게 현실감각을 일깨워주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제 딸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속에서만 살려고 하고 가상 세계 속 삶을 실제로 경험하는 삶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며 “그는 사람들에게 진짜 현실이 무엇인지 일깨워주는 것이 제 작업이 전하는 메시지”라고 설명했다.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그러한 리얼리즘이야말로 사진으로 표현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 같은 질문에 작가는 “사진은 효율적이기 때문에 괜찮고 그림은 비효율적이기 때문에 불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 과정에 대한 불평등한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사진과 사실주의 그림은 실제와 똑같이 표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두 가지 매체 중 하나”라며 “그중 그림은 완성 과정이 다소 불편할 뿐 불편하다고 해서 불필요한 건 아니다”라고 했다.
강강훈이 전속으로 있는 조현화랑에 따르면 현재 그의 작품은 대기를 걸어야 할 만큼 인기가 높다. 하지만 작가는 안주하지 않고 다양한 방법으로 작품의 변주를 고민하고 있다. 우선 작품의 크기는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또한 최근 그의 캔버스에 딸과 함께 자주 등장하는 목화를 좀 더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볼 계획이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던 중 우연히 본 ‘목화’는 작가의 근원이 된 존재이자 과거다. 딸은 자신을 투영한 자아이면서 동시에 다음 세대다. 그는 “작가는 그림이라는 매체를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방법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며 “현재의 작업이 어떻게 진행되느냐에 따라 다음 세대의 모습이 변화할 것이라 믿는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