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무역전쟁으로 글로벌 공급망이 단절되면서 그 사이를 연결하는 인도와 베트남 등 아시아 국가들이 ‘스윙컨트리(Swing Country)’로 급부상하고 있다. 스윙컨트리는 강대국이 주도권을 쥐기 위해 경쟁을 벌이는 지정학적 위치에 놓여 있어 공급망 및 협상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지역(geopolitical swing states)과 유사한 의미다. 특히 베트남·인도·태국·싱가포르·말레이시아 5개국은 미국 시장에서 중국의 빈 자리를 급속히 채워나가며 반사이익을 누리는 한편 국제 무대에서의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11월 미국 대선에서 맞붙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은 모두 대중(對中) 강경 기조를 지속할 가능성이 높은 만큼 주요 2개국(G2) 사이의 단절된 공급망을 채우는 이들 국가의 영향력은 더욱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11일 서울경제신문이 블룸버그통신 통계를 바탕으로 집계한 바에 따르면 미중 무역 갈등이 본격화한 2018년부터 지난해까지 인도태평양 5개국의 대미 수출액은 대폭 증가했다. 베트남은 지난해 미국에 총 1144억 달러(약 156조 원)어치를 수출했는데 2018년(491억 달러)과 비교하면 무려 132.9% 늘어난 규모다. 태국 역시 같은 기간 대미 수출액이 319억 달러에서 564억 달러로 2배 가까이 뛰었다. 이 밖에 인도(54.5%), 싱가포르(52.1%), 말레이시아(17.3%) 등도 미국 수출이 크게 늘었다.
반면 중국의 대미 수출 규모는 지난해 4272억 달러를 기록해 5년 전(5385억 달러)보다 1112억 달러(20.7%) 급감했다. 앞서 언급한 5개국의 대미 수출 증가분 총액(1399억 달러)과 맞먹는 규모다. 미국을 향하던 중국의 교역이 방향을 튼 지역 또한 인도태평양이다. 중국은 지난해 베트남에 1051억 달러를 수출했는데 2018년(655억 달러) 대비 60.3% 증가한 수준이다. 인도는 대중 수입이 738억 달러에서 992억 달러로 늘었으며 인도네시아(42.0%), 태국(41.7%), 말레이시아(30.8%), 싱가포르(18.3%) 등 역시 중국과의 교역 규모를 크게 키웠다.
중국이 미국 대신 인접한 인도태평양 지역으로 원자재 등 수출을 늘리고, 인도태평양 국가들이 이를 가공해 생산한 완제품을 미국으로 수출하는 흐름도 포착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1기 행정부 당시 미중 무역전쟁이 본격화하면서 글로벌 기업들이 중국 내 생산기지를 인근 국가들로 옮긴 데 따른 것이다. 베트남과 인도·말레이시아 등은 낮은 인건비와 안정적인 정치 환경, 거대한 소비 시장 등이 장점으로 부각됐다. 국제통화기금(IMF)은 “2022년 한 해 동안만 3000건의 새로운 무역 제한 조치가 발표됐다”며 “무역과 투자 환경이 사업적 펀더멘털보다 지정학적 선호도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인도태평양 5개국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 노선을 취하며 정치적인 ‘스윙컨트리’로서의 존재감도 키우고 있다. 중국의 전통적 우방국인 베트남은 지난해 미국과 최고 수준인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를 체결했다. 인도는 신흥국 경제 연합체인 브릭스(BRICS)에서 중국·러시아와 협력하면서도 미국 중심의 반중(反中) 안보 협의체인 쿼드(QUAD)에도 소속돼 있다.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종주국인 인도네시아 역시 중립 노선을 유지하며 이해관계에 따라 입장을 달리하는 외교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지정학적 경합 국가(geopolitical swing states)’ 개념을 구체화한 재러드 코헨 골드만삭스 글로벌 부문 총괄 사장은 “미국과 중국은 국제질서를 자국 위주로 재편하기 위해 신흥국들에 때로는 구애하고 때로는 위협을 가하고 있다”며 “세계가 분열할수록 영향력을 확장할 더 많은 기회를 포착하게 된다”고 분석했다.
11월 미국 대선 이후 누가 백악관의 주인이 되든 미중 갈등이 본격화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인도태평양 5개국의 위상도 더욱 높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미중 무역전쟁을 촉발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정권을 잡을 경우 대중 무역장벽은 1기 정부 때보다 훨씬 높고 견고해질 것으로 관측된다. 그는 이미 모든 중국 수입품에 대해 60% 이상의 초고율 관세를 매길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해리스 부통령 역시 대중 관세나 무역 조치와 관련해 조 바이든 행정부의 강경 기조를 이어갈 것으로 전망된다. 바이든 정부는 5월 중국산 전기차에 대한 관세를 기존의 4배인 100% 이상으로 높였으며 반도체·철강·알루미늄 등에 대해서도 관세를 2~3배 인상했다. 낸시 첸 노스웨스턴대 경제경영학 교수는 “트럼프의 공화당과 바이든·해리스의 민주당은 중국에 대한 경제적 접근법에서는 별반 다르지 않다”며 “특히 국가 안보와 직결된 첨단기술 산업에서 미국은 경쟁국(중국)을 반드시 찍어 누르려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