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경복궁 담장 한복판에 커다랗게 스프레이 낙서가 그려지면서 문화재 훼손 범죄가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습니다. 2008년 ‘국보 1호’였던 숭례문이 방화로 소실된 데 이어 지난해 ‘조선의 얼굴’인 경복궁마저 훼손되면서 큰 충격을 남겼는데요. 유사 범죄를 막기 위해 정부는 철통 같은 감시를 약속했지만, 지난 14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선릉에 주먹 만한 구멍이 났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범인은 50대 여성. 아직 동기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앞선 범죄들처럼 소중한 문화유산을 훼손했다는 점에서 공분을 불러오고 있습니다. 잇단 문화재 범죄, 경찰의 수사는 어떻게 이어졌는지 짚어보겠습니다.
오전 새벽 2시 30분, 성종 왕릉에 구멍이 뚫렸다
A씨의 범죄가 드러난 것은 광복절을 하루 앞둔 오전 11시였습니다. ‘누군가 선릉에 침입해 봉분 흙을 파헤쳐 훼손시켰다’는 신고가 접수된 것인데요.
경찰은 수사에 착수했고, 이날 새벽 2시 30분께 조선 왕릉 선릉에 침입한 50대 여성 A 씨가 특정됐습니다. 현장에 간 수사당국이 조사한 결과 당시 봉분 아랫부분에 지름 약 10㎝, 깊이 약 10㎝인 주먹 하나 정도 크기의 구멍이 난 것으로 알려졌죠. A씨는 전통담장과 철골 담장 사이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봉분을 훼손한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선릉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문화유산입니다. 서울 지하철 2호선 ‘선릉역’으로도 유명하지만 조선 임금 성종과 그의 계비 정현왕후, 아들인 중종이 잠들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 중에서 A 씨가 훼손한 능은 성종 왕릉이었습니다. 조선 초기 성군으로 불린 성종. 두 번째 왕비였던 윤 씨를 폐비하고, 장남인 연산군은 폐위되는 수난을 겪었지만 수백 년이 흐른 현대에서도 당혹스러운 일을 겪은 셈입니다.
서울 강남경찰서는 동선 추적 끝에 같은 날 신고 6시간 만인 오후 5시 40분께 경기도 소재 자택에서 A씨를 체포했다고 밝혔습니다. A씨는 문화유산법 위반·건조물침입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이어 16일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국가지정문화재인 선릉과 국가유산청 관리시설을 침입했다”면서 “잇단 문화재 훼손사건 발생으로 모방범죄가 우려된다”고 구속영장을 신청했고요.
다만 구속영장을 발부하는 법원은 영장을 기각했습니다. 16일 서울중앙지법(신영희 영장전담 부장판사)은 “(A 씨가) 혐의를 인정하고 있고 초범인 점, 수사와 심문에 임하는 태도, 범행 동기, 피해 정도, 수집된 증거와 가족관계 등을 고려했다”고 기각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아직 A 씨는 범행을 저지른 동기를 진술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유는 차치하고서라도 경찰이 ‘모방범죄’를 우려할 정도로 문화재 훼손이 잦다면 그 또한 문제일 수밖에 없는데요.
그때 그 경복궁 낙서, 범인들은 어떻게 됐을까
사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문화재보호법(문화유산법) 위반 건수는 줄어들고 있는 추세입니다. 경찰청에 따르면 2019년 142건이었던 발생 건수는 2020년 107건으로 급락했다가 2021년 150건→2022년 124건→2023년 110건으로 감소 추세에 있죠.
그러나 여전히 100건을 웃돌고 있는 데다가 충격적인 범죄가 이어지면서 경각심은 나날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지난해 불법 온라인 사이트를 홍보하기 위해 경복궁 담벼락에 낙서를 한 이들을 기억하시나요?
알고 보니 이 사건은 불법 온라인 사이트 운영자였던 30대 강 모 씨(일명 ‘이 팀장’)가 10대 청소년 임 모(17)군과 김 모(16)양에게 ‘낙서하면 300만 원을 저겠다’며 사주한 사건이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강 씨는 이러한 온라인 사이트를 운영하면서 저작물을 무단으로 배포했을 뿐만 아니라 불법 촬영물,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등도 배포한 혐의를 받습니다. 강 씨는 경찰 조사 도중 2시간가량 도망치면서 서울 시내가 발칵 뒤집어지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죠. 임 군과 김 양 또한 각각 문화재보호법 위반과 방조 혐의로 기소됐습니다.
‘선릉 테러’가 일어난 지난 14일, 강 씨에 대한 첫 공판도 진행됐습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6부(부장판사 이현경)가 진행한 첫 공판에서 강 씨의 변호인은 “공소사실 전체는 인정하지만, 단독으로 하지 않고 공범이 있는 걸 감안해 달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자신이 아닌 일명 ‘김 실장’이 지시를 했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검찰은 “수사 과정에서 강 씨가 ‘김 실장’의 존재를 말했지만, 사용하던 휴대전화를 버려 특정할 자료가 없다”면서 “‘김 실장’의 존재는 없는 것으로 본다”고 반박했습니다.
한편 ‘경복궁 낙서’ 모방범은 지난 6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습니다. 1심은 “양극성 정동장애(조울증) 진단을 받고도 약을 먹지 않아 범행 당시 정신 상태가 온전하지 않았고, 범행 복구 비용을 피고인의 보호자가 모두 변상한 점” 등을 선고 이유라고 밝혔죠.
문화유산 훼손, 3년 이상 유기징역…"예방·처벌 최선 다해야"
문화유산법 92조에 따르면 “국가지정문화유산을 손상, 절취 또는 은닉하거나 그 밖의 방법으로 그 효용을 해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문화유산은 한 번 훼손되면 복구하기까지 큰 비용이 들고 복구 과정도 까다롭기 때문입니다.
국가유산청(문화재청)은 올 1월 ‘국가유산 훼손 재발 방지 종합대책 언론설명회’를 통해 경복궁 낙서로 인해 발생한 총 복구비용 1억 여 원을 피의자들에게 청구할 방침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또 유사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법정형만큼의 형벌이 나올 수 있도록 강력히 대응할 예정이라고 발표했고요. 최근 판례에서 징역형이 선고되는 흐름이 이어지는 만큼, 향후에도 문화유산 훼손은 중한 범죄로 다뤄질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다만 올 1월 국가유산청이 조선 왕릉에 대해서도 ‘출입부와 주요 관람영역에 낙서금지 등에 대한 안내배너 42개’를 설치할 계획을 밝혔지만, 7개월 후 선릉의 훼손을 막지 못했던 만큼 국가유산 보호의 허점을 되짚어봐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됩니다. ‘선릉 테러’ 사건에서 경찰이 모방범죄를 우려해 구속영장을 신청한 만큼, 향후에도 수사기관의 기민한 대응 또한 이어져야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