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1위 반도체 장비 제조업체 ASML의 최고경영자가 반도체 업계 불황이 내년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지난 15일(이하 현지시간) 실망스러운 실적으로 전세계에 '반도체 겨울론'을 퍼뜨린지 하루만에 이를 인정한 것이다.
16일 블룸버그통신 등에 따르면 크리스토프 푸케 ASML 최고경영자(CEO)는 이날 투자자들과의 전화회의에서 "반도체 부문 수요 회복이 더디게 진행되면서 고객들이 신중을 기하고 투자를 일부 미루고 있다"면서 "수요 부족 상황은 족히 내년까지는 이어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푸케는 인공지능(AI) 혁신과 에너지 전환, 전기화 진행 등이 반도체 업계 상승 여력을 계속 제공하고 있긴 하지만 자동차와 모바일, PC 시장의 수요 회복은 특히 더디다고 덧붙였다.
이에 따라 ASML은 단기 투자 계획을 늦출 것이라고 밝혔다.
네덜란드 기업인 ASML은 첨단 반도체 양산에 필수인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독점 생산한다. 한국의 삼성전자나 대만 TSMC 등 주요 반도체 제조업체들이 애플의 스마트폰이나 엔비디아의 AI 가속기에 필요한 최첨단 반도체를 생산하는 데 ASML 장비를 사용하고 있다.
ASML은 업계 내에서 '슈퍼 을'로 불렸지만 최근 시장 예상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예약실적 등 턱없이 부족한 실적을 내놓으면서 주가가 15일 16% 급락했다. 이어 16일에도 주가가 5.1% 추가 하락했다.
푸케는 "지금 AI조차 없다면 시장은 매우 슬플 것"이라면서 "업계는 모두가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더딘)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로저 다센 ASML CFO는 회사의 부진한 실적 원인 중 하나로 주요 장비를 중국에 수출하지 못하게 한 미국의 조치를 지목했다.
그는 중국 매출 급감 이유를 묻는 애널리스트의 질문에 "우리는 모두 수출 통제에 대한 추측이 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서 "중국 매출에 대해 보다 신중한 전망을 가져야 하는 이유"라고 답했다.
ASML은 미국의 수출 제한 조치로 중국에 최첨단 EUV 장비를 판매하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중국 기업들은 이보다 등급이 낮은 ASML의 DUV 장비를 사서 사용하고 있다. DUV 장비 역시 반도체 회로를 만드는 데 쓰인다.
작년에 ASML 매출의 29%는 중국에서 나왔다. 올해는 1~3분기 미국의 규제 강화를 우려해 선매입에 나서면서 매출 비중이 약 47~49%까지 올랐다.
'반도체 전쟁' 책의 저자인 크리스 밀러는 CNBC에 보낸 이메일 논평에서 "중국은 ASML에 매우 중요한 시장으로 매출 대부분이 구형 제조 장비에서 발생한다"면서 "역설적으로 중국으로의 DUV 수출 제한은 중국의 장비 구매를 자극해 ASML 매출에 크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