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 IB&Deal

조단위 대어 줄줄이 몸값 하락…당장 '엑시트' 할 기업에만 눈독 [시그널]

■몸 사리는 모험자본…자금조달 시장 양극화 뚜렷

비바리퍼블리카 2년새 가치 14%↓

컬리·오아시스도 5000억 못미쳐

수익률 악화 속 민간LP 지갑 닫자

정책금융 의존 VC, 초기기업 외면

"이대로면 3년뒤 스타트업 씨 말라"

출자 허들 낮추고 RWA 완화 필요





“현재 톱티어 밴처캐피털(VC)은 정책금융들의 정기 출자 사업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저금리 시기에 스타트업 몸값이 많이 올라갔다 보니 다들 신규 투자를 꺼리고 있죠.”(운용자산 1조 원 규모 VC 본부장)



“컬리 같은 기업들 몸값이 반 토막이 났어요. 지갑을 여는 민간 유한책임투자자(LP)가 줄어들고, 있어도 굵직한 1~2개 딜을 하려고 하니 시중에 드라이파우더(투자 집행이 이뤄지지 않은 자금)가 많대도 우리에게는 오지 않죠.”(운용자산 1000억 원 규모 VC 대표)

국내 모험자본 시장이 출자금 확보 난도 상승과 증시 약세로 인한 투자금 회수(엑시트) 난항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다. 유동성이 풍부했던 코로나19 시기 공격적으로 투자를 받았던 조 단위 ‘대어’들도 지나치게 높아진 몸값에 상장 발목을 잡혔다. 모태펀드를 비롯한 정책금융의 신규 출자가 올 상반기 소폭 늘어나기는 했지만 민간 출자자들은 여전히 몸을 사리고 있다. 이마저도 유망한 초기 기업을 발굴하기보다 눈앞에 성과를 낼 수 있는 후기 기업 투자라는 ‘보신주의’가 두드러진다. 시장에서는 VC와 스타트업 양방향에 대한 ‘옥석 가리기’가 어느 정도 완료될 때까지 모험자본 시장 약세가 지속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까지 나온다.

19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최근 국내 대신 미국 증시 상장으로 선회한 비바리퍼블리카의 장외시장 기업가치는 약 7조 8000억 원에 형성돼 있다. 재작년 마지막 투자 유치 당시 인정 받았던 기업가치 9조 1000억 원보다 약 14% 낮은 수준이다. 조 단위 기업가치로 증시 입성을 추진하다 투자심리 악화로 상장을 철회했던 컬리·오아시스 등도 현재 장외시장에서는 기업가치가 5000억 원이 채 되지 않는다.



농축수산물 거래 플랫폼을 운영하는 트릿지의 몸값을 3조 6000억 원으로 평가하며 투자했던 DS자산운용의 경우 최근 사업보고서에서 트릿지의 자산가치를 0원으로 책정하기도 했다. 한때는 벤처투자 업계에서 각광 받았던 기업들이지만 이제는 이들 기업에 투자했던 재무적투자자(FI)들이 엑시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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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두 사태’ 이후 금융 당국의 상장 심사가 깐깐해지면서 비상장 스타트업 투자 난도는 중소형 기업일수록 더 높아졌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올 들어 코스닥 상장을 추진하던 기업 중 35곳이 거래소 예비 심사 도중 심사를 자진 철회하거나 미승인을 받았다. 지난해(14곳) 대비 1.5배 늘어난 수치다.

여기에 최근 공모주 시장이 급격히 냉랭해진 데다 증시 부진이라는 악재까지 겹쳤다. 주가지수가 하락하면 벤처투자 역시 비슷하게 감소하는 경향이 있다. 기업공개(IPO)는 VC 엑시트 비중의 30~35%를 차지하는 핵심 통로지만 공모주 투자 선호가 약화하면서 피투자기업 상장을 통한 엑시트가 위축됐다. 코스닥지수는 연초 878.93에서 이달 13일 700선이 깨진 뒤 이날 686.46로 약 21.9% 떨어졌다.

한 VC 대표는 “현재 몸값이 많이 낮아진 기업 중심으로 투자할 만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는 것은 맞다”면서도 “앞서 메이저 포트폴리오들이 힘을 못 쓰고 있으니까 적극적인 투자가 이뤄지기 어렵다”고 말했다.

실제 VC 수익 모델이 악화하면서 민간 영역에서의 신규 출자 감소세가 뚜렷하게 나타났다.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연기금 및 공제회의 벤처펀드 신규 출자액은 2022년 1조 3268억 원→2023년 6659억 원→2024년(9월 말 기준) 3115억 원으로 급격히 줄었다. 일반 법인의 신규 출자 역시 같은 기간 3조 6703억 원에서 1조 6426억 원으로 절반 이상 감소했다. VC 펀드에 공격적으로 출자해오던 보험·캐피털 등 금융사들도 정부가 위험가중자산(RWA) 규제 수위를 높이자 출자 규모를 축소하고 있는 추세다. 또 다른 VC 대표는 “정책금융으로부터 시드머니를 받아도 중소형 VC들은 민간 LP로부터 자금을 조달하기 어려워 신규 펀드 조성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전했다.

이에 국내 VC들은 업력 3년 이하의 초기 기업보다는 업력 7년 이상 후기 기업 투자를 늘리며 ‘펀딩 가뭄’을 버티고 있다. VC의 초기 기업 투자액은 2022년 2조 50억 원→2023년 1조 3270억→2024년(9월 말 기준) 8936억 원으로 감소한 반면 후기 기업 투자액은 같은 기간 2조 285억 원→2조 387억 원→2조 1108억 원으로 증가했다. 유망 기업을 발굴한다는 모험자본의 의미가 무색하게 당장 엑시트가 이뤄질 수 있는 기업에 투자가 몰리는 셈이다. 이대로라면 창업 초기 시드 투자가 절실한 스타트업들이 자금을 조달하지 못해 씨가 마를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업계에서는 뚜렷한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투자심리가 하방을 다지기를 마냥 기다리는 분위기다. 신규 VC 등록 건수가 2022년 42건, 2023년 19건, 올 9월 말까지 9건으로 증가 폭 둔화가 두드러진 만큼 이제는 VC 업계에도 옥석 가리기가 본격화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모태펀드 출자를 받기 위한 허들을 낮추고 금융사에는 모험자본 투자에 대해 RWA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대기업 계열 VC 대표는 “일단은 상장 시장 자체가 살아나야 한다”며 “과거에도 그러했듯 성공적인 엑시트 혹은 실적을 보여주는 사례가 한두 건 시장에 나오면 투자심리 반등의 계기가 되고 유동성도 개선될 것”이라고 밝혔다.


김남균 기자·황정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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