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해제 여파로 국정 운영 동력이 사라지면서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대응과 반도체·인공지능(AI) 산업 경쟁력 강화 등이 좌초될 위기에 처했다. 의료·연금·교육·노동 등 4대 개혁도 추진이 불가능해졌다. 구조 개혁의 경우 이해관계자의 반발이 커 정부가 강력한 개혁 의지를 갖고 저항을 뚫어내야 하지만 이번 사태로 개혁 작업이 물 건너갔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원전과 동해 심해 가스전 탐사 개발 같은 에너지 분야도 타격이 예상된다.
고려대 총장을 역임한 이필상 서울대 특임교수는 4일 서울경제신문과의 통화에서 “평소 트럼프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는 트럼프 2기 출범을 앞두고 국익을 위해 최근 트럼프 휴양지로 달려갔다”면서 “우리도 그런 빠른 대응이 필요한데 이번 사태로 경제정책이 표류하고 정부 기능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이 돼 버렸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그동안의 정책도 거대 야당의 반발로 제대로 추진하지 못했는데 이번엔 대통령이 정책 불확실성을 완전히 키워 버렸다”며 “경제를 혼란에 빠뜨린 책임을 피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당장 약 1조 원에 달하는 반도체·AI 지원 방안이 공중으로 날아갈 위기에 놓였다. 정부는 이들 산업의 글로벌 경쟁력 강화를 위해 국회와 지원 확대를 논의했지만 야당이 감액만 반영된 예산안을 일방적으로 처리하면서 그동안의 논의가 수포로 돌아갔다. 업계 일각에서는 이 달 중에 여야가 막판 협상을 벌여 반도체 지원을 늘릴 것이라는 기대감도 남아 있었지만 정국 경색으로 사실상 어렵게 됐다는 분석이다. 특히 직접 보조금 지급 같은 파격적인 대책은 기대하기가 어려워졌다.
경제 활력 제고를 위해 정부가 추진 중인 상속증여세 개정과 세법 개정안 역시 정국 경색으로 공전할 가능성이 높다. 예산안과 함께 정부가 적극 추진 중인 세법 개정안 조항들은 국회 문턱을 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이 흘러나온다.
의료 개혁도 무산될 가능성이 높다. 의료계의 강한 반발에도 올해 의대 정원을 1540명 늘린 정부는 내년 정원도 확대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번 사태로 개혁을 이끌어갈 동력이 크게 약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10개월째인 의정 갈등의 가장 큰 원인인 내년도 의대 정원 증원 문제부터 교착상태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전공의 집단 사직과 이에 따른 의료 공백 대책을 논의할 여야의정협의체가 좌초된 상태에서 정부가 사태 해결에 적극 나서기가 어려워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의료개혁특별위원회를 통해 논의해 온 비급여·실손보험 개혁, 전공의 수련 환경 개선, 의료사고 안전망 대책, 상급종합병원 구조 전환 등 개혁 과제들도 힘이 실리기 어렵게 됐다.
국민연금 개혁도 마찬가지다. 국민연금은 이대로 두면 하루에 약 885억 원씩 부채가 쌓이는 구조다. 정부안(보험료율 13%, 소득대체율 42%)이 나와 있지만 국회에서는 공식적인 논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번 사태에 따른 정국 경색으로 여야의 연금 개혁 논의는 더 뒤로 미뤄질 가능성이 커졌다.
대왕고래 프로젝트도 무산될 우려가 있다. 이 프로젝트는 윤 대통령이 돌발 비상계엄 선포 명분으로 삼은 예산 농단 사례에 포함됐다. 야당의 감액 예산안에 시추를 위한 정부 출자금이 전액 삭감된 상황에서 향후 여야 합의로 증액될 가능성은 더욱 낮아졌다는 분석이다. 정부 안팎에서는 1차 시추를 끝으로 프로젝트가 중단될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번 사태로 주요 10개국(G10) 가입 논의까지 나올 정도로 자유민주주의 동맹의 한 축으로 자리를 잡아가던 한국의 입지에도 심각한 타격을 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조 바이든 대통령이 민주주의를 중시하는 만큼 민주주의 후퇴로 볼 수 있는 이번 사태로 한미 동맹에도 균열이 생길 수 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은 1기 때 선진국 모임인 주요 7개국(G7)을 한국·호주·인도를 포함한 G10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추진한 바 있다. 국내 외교가에서는 다가오는 트럼프 2기에서 한국이 G10 가입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지만 이번 사태로 찬물을 맞게 됐다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한국의 입지에도 타격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계로는 사상 처음 미국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된 앤디 김(민주·뉴저지) 연방 하원의원은 “이번 계엄령 선포 방식은 국민의 통치라는 근본적인 기반을 약화하고 한국의 취약성을 증가시켰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