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정책

[유동성 함정 빠진 한국]길잃은 돈 부동산·예금·채권으로 몰려...통화정책 효과 떨어져

예금銀 요구불 예금 회전율 2분기 19.3% 사상 최저

지난달 장외채권 거래대금도 22조 늘어 437조 달해

개인 소비 여력은 바닥...규제개혁으로 투자유도해야




우리 경제가 함정(trap)에 빠지고 있다. 시중에 돈이 넘쳐나는데 기업의 투자와 소비가 늘지 않아 경기가 나아지지 않은 유동성 함정이다. 징후는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화폐유통속도와 통화승수가 하락하고 소비와 투자는 정체되거나 오히려 후퇴하는 것이 단적인 증거다. 갈 길 잃은 돈은 생산활동과 관계없는 부동산 거래에 몰리면서 자산가격만 끌어올리고 있다.

돈이 돌도록 하기 위해서는 기업이 새로운 성장동력에 투자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소비자에게 다양한 금융상품을 제시할 수 있는 금융혁신이 절실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금리 낮아도 괜찮아’ 예금·채권에 몰리는 돈=돈이 거래활동에 얼마나 많이 사용됐는지를 보여주는 화폐유통속도는 지난 1·4분기 사상 최저치로 떨어졌고 통화승수도 올 2월 16 밑으로 떨어졌다. 통화승수는 시중 금융기관의 신용창출 정도를 보여준다. 은행의 기업 또는 가계대출이 활발하면 승수는 올라가고 반대면 떨어진다.

실제 시중에 풀린 돈은 생산활동에 쓰이지 않은 채 은행 예금 등 안전자산에 몰려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4~6%를 오가던 예금은행 예금 증가율이 올 들어 6%를 넘어섰다. 반면 예금은행 요구불예금 회전율은 올해 2·4분기 19.3%를 기록 20%대마저 붕괴됐다. 2·4분기 기준 사상 최저치다. 예금에 몰린 돈이 좀처럼 소비활동에 쓰이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안전자산으로 분류되는 채권에 대한 수요도 많다. 지난달 장외채권 거래대금은 전월 대비 22조원 증가한 437조원을 기록했다. 기업들도 저금리를 틈타 채권 발행에 여념이 없다. 지난달 회사채 발행 규모는 14조1,116억원으로 전월보다 16.5% 늘었다. 저금리에도 불구하고 안전자산으로 돈이 몰리는 현상을 이용해 최대한 싼값에 돈을 마련하고자 채권 발행을 확대한 것이다.


◇소비·투자는 외면=이런 돈맥경화 현상은 실물경제 침체로 이어지고 있다. 우선 투자할 곳이 없다 보니 은행 대출은 저조하다. 올 2·4분기 제조업 대출금 증가율은 최근 2분기 연속 하락했다. 기업 설비투자 증가율은 5월과 6월 마이너스를 기록했고 2·4분기 소비 증가율(전기 대비)은 0.3%에 그쳐 2분기 연속 하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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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부동산 시장은 ‘돈 풍년’이다. 최근 서울 아파트 매매가격이 급등하고 거래량은 증가하고 있다. 금융당국의 대출규제에도 가계부채 증가율은 경제성장률을 웃돌고 있다. 유례없는 초저금리로 사업자대출과 신용대출까지 동원해 부동산 투자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부동산 급등의 근본원인은 풍부한 유동성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조영무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시중 자금 공급은 넉넉한데 이 돈을 사용할 수요가 없다”며 “이런 현상이 지속되면 자원배분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규제개혁으로 활로 모색해야=전문가들은 시중에 풀린 돈이 생산 부문으로 흘러들어가도록 유도하기 위해서는 투자 활성화가 유일한 해법이라고 입을 모은다. 노후 불안정과 고용 쇼크 등으로 개인들이 소비는 꺼리고 자산 형성을 위한 부동산에만 관심을 보이고 있어서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기업들이 왜 투자를 꺼리고 배당이나 내부 유보에만 혈안이 돼 있는지부터 들여다봐야 한다”며 “금리의 고하를 불문하고 수익만 낼 수 있다면 과감히 투자하는 게 바로 기업”이라고 지적했다.

조 연구위원도 “미국은 기준금리를 올리는데도 경제가 활성화되고 있다”며 “결국 중요한 것은 금리 수준이나 통화량이 아니라 투자를 활성화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져 있느냐의 여부”라고 꼬집었다.

우리 금융시장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은행 등 금융기관들이 사실상의 무위험 대출인 주택담보대출 등에만 혈안이 돼 있고 생산적 부문인 기업대출에는 소극적인 것이 자금의 부동화 현상을 심화시킨다는 것이다. 한 금융전문가는 “우리 금융기관들은 글로벌 경쟁력이 없는 우물 안 개구리”라며 “해외 금융기관처럼 위험을 감수하며 기업대출을 하지 않고도 수익을 낼 수 있다 보니 신용창출 기능이 떨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능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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