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삼성 파운드리사업부는 내년 4·4분기 14나노 공정으로 인텔의 제품을 양산하기로 했다. 오는 2021년 출시 예정인 인텔의 14나노 PC용 CPU ‘로켓레이크’로 추정된다. 내부 사정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소문만 무성했던 인텔과의 계약 논의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자체 팹을 보유한데다 철저한 수직계열화를 지향해온 인텔이 일부 저가형 제품 외에 CPU 생산을 외부에 맡긴 것은 처음이다.
이는 인텔이 지난해 하반기부터 CPU 공급 적체에 시달린 상황과 관련이 깊다. 공정 미세화가 지연되면서 지난해 10나노 공정으로 만들 예정이었던 인텔 신제품들은 14나노 생산라인으로 대거 몰렸다. 인텔이 뒤늦게 신규 생산라인 확보에 나섰지만 공장 건설에 수년이 소요되는 만큼 위탁생산은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올 들어 전방위 수주에 성공하면서 삼성 파운드리사업부는 TSMC의 턱 밑까지 추격하고 있다. 지난해 IBM의 서버용 CPU 공급 계약을 따낸 삼성 파운드리는 최근 엔비디아의 차세대 그래픽처리장치(GPU), 퀄컴의 차세대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물량까지 확보했다. 애플, 하이실리콘(화웨이) 외에 최첨단 공정을 활용하는 반도체 설계 기업 대부분을 고객사로 두게 된 셈이다.
인텔이 파운드리로 세계 1위 업체인 대만 TSMC가 아닌 삼성전자 파운드리를 택했다. 경쟁사인 AMD를 의식한 동시에 화웨이 제재에 날을 세우는 미국 정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한 일석이조의 전략적 결정을 내린 것으로 풀이된다.
◇인텔, 왜 TSMC 아닌 삼성 택했나=인텔은 CPU 시장 경쟁사인 AMD를 고려한 결정을 내렸을 가능성이 높다. AMD의 파운드리를 담당하던 글로벌파운드리가 지난해 7나노 이하 미세공정을 포기한 뒤 AMD는 TSMC에 7나노 CPU와 GPU 신제품을 위탁했다. CPU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한 인텔이지만 공정 미세화 지연으로 AMD가 점유율을 빼앗을 것이라는 전망이 힘을 받자 신경이 곤두서 있는 상황이다. 이에 AMD의 제품 성능을 놓고 신경전을 벌이기도 하는 인텔이 TSMC에 자사 제품을 위탁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미중 무역분쟁이 격화하면서 미국 정부가 화웨이를 겨냥한 것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화웨이의 반도체 설계 자회사 하이실리콘의 제품 대부분을 생산하는 TSMC는 앞서 미국 정부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화웨이와 거래를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도현우 NH투자증권 연구원은 “단기적으로는 미국 정부의 견제로 인해 일부 미주 고객들이 파운드리 업체로 TSMC보다 삼성전자를 선호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고 전망한 바 있다. 실제 밥 스완 인텔 최고경영자(CEO)는 16일(현지시간) 블룸버그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의 중국에 대한 추가관세 타격을 완화하기 위해 글로벌 공급망을 어떻게 운영할 것인지 고민하고 있다”고 밝혔다. 인텔의 글로벌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삼성 파운드리가 효과적인 대안으로 떠올랐을 수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삼성전자 파운드리사업부가 후발주자로 펴고 있는 공격적인 영업전략도 인텔의 구미를 당겼을 가능성이 있다. 최근 삼성 파운드리는 일부 기업을 대상으로 TSMC 대비 60% 수준의 파격적인 생산 단가를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은 TSMC가 소량 생산 시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도입한 ‘다중 레이어 마스크(MLM)’ 세트보다도 저렴한 풀 마스크 세트 가격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마스크는 웨이퍼 위에 회로를 그릴 때 활용되는 일종의 필름이다.
◇삼성 반도체 부문 매출에 청신호=거대 고객사를 줄줄이 확보한 삼성 파운드리는 내년까지 실적이 급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이번 인텔과의 계약은 파운드리 매출에 큰 호재다. 퀄컴·엔비디아 등이 선택한 최신 7나노 극자외선(EUV) 노광 공정과 달리 14나노 공정은 오랜 성숙 기간을 거쳤기 때문이다. 반도체 업계의 한 관계자는 “현재 파운드리 업계 매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10~14나노 공정”이라며 “수율이나 성능이 검증된 상태라 제조업체 입장에서는 낮은 비용으로 많은 고객을 유치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인텔의 CPU 공급난 해소는 삼성 메모리 사업부에도 숨통을 틔워줄 가능성이 높다. 서버용 CPU가 제때 공급되지 못하면서 아마존·구글 등의 업체들이 데이터센터 투자를 미룬 것이 올 상반기 메모리반도체 가격 급락에 결정적 원인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인텔이 14나노 추가 생산 여력을 확보하면 위축됐던 PC용 메모리 수요 또한 점차 회복될 것으로 보인다.
인텔이 삼성전자와 세계 반도체 매출 1, 2위를 다투는 기업이라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시장조사업체 IC인사이츠에 따르면 지난해 삼성전자 반도체는 785억달러로 세계 반도체 매출 1위였고 인텔이 699억달러로 뒤를 이었다. 그러나 IC인사이츠는 올해 메모리 불황으로 삼성전자(631억달러)가 인텔(706억달러)에 반도체 왕좌를 내줄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