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위협받는 것과 버금가는 심각한 상황에 직면한 후 나타난다고 알려진 PTSD는 오늘날 가장 빈발하는 불안장애의 하나다. 과연 그 실체는 무엇이며 또 어떻게 치료할 수 있을까.
공포는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지극히 자연 스러운 감정이다. 또한 공포는 사람의 안전한 생존을 돕 는 일종의 경보기 역할도 한다. 만약 공포를 느끼지 못한다 면 포효하는 야생의 맹수에게 겁 없이 다가서다가 심각한 부상을 입거나 심지어 죽음에 이를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전혀 예측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절대적인 공포에 직면하게 된다면 사람은 그 공포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정신적 외상을 입을 수 있다. 이러한 사람들 중에는 당시의 충격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하고 고통을 받기도 한다.
이렇듯 극심한 정신적 충격 이후 나타나는 극도의 불안증세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라 한다. PTSD는 1960~1970년대 베트남전쟁 종전 이후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심각한 심리적 불안감을 호소한 미군 병 사들을 본격 연구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전쟁뿐 만 아니라 생명을 위협하는 신체·정신적 충격, 가령 폭행· 강간·테러·자연재해·교통사고 등을 겪은 이들에게서 이와 유사한 증상이 나타난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집요하게 반복되는 기억
PTSD를 포함한 불안장애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해 온 서울 대 의대 정신과·자연대 뇌과학 협동과정 류인균 교수는 "충 격적 사건을 경험한 이들 모두가 이 질환을 앓게 되는 것은 아니다"며 "심리적 충격이 클수록, 빈도가 잦을수록 그 위험 성이 높다"고 말했다. 특히 학계에서는 사건 경험 전의 심리적·생물학적 요인 이 PTSD의 발병에 관여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 위험인 자로는 어린 시절의 심리적 상처, 정신과 질환에 취약한 유 전적 특성, 과도한 스트레스 등이 거론된다. 이중 유전적 특성과 관련해 류 교수는 "정신질환에 대한 가족력이 있거나 부모가 PTSD를 앓았을 경우 PTSD에 걸 릴 위험이 높아 어느 정도 유전적 영향이 있는 것으로 추정 된다"면서도 "이 부분에 대한 유전자 연구 결과들은 아직까 지 다소 일관성이 떨어지는 편이다"고 설명했다.
어쨌든 PTSD 환자들의 고통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 을 정도다. 하루 종일, 다시 말해 깨어있을 때는 물론 잠을 청할 때조차 사고 당시의 기억이 집요하게 반복적으로 떠올 라 극도의 긴장상태가 지속된다. 이로 인해 성격마저 변할 수 있으며 대인관계에 치명적 문제를 유발하게 된다.
또한 합병증으로 해리장애, 공황발작 등을 동반하기도 한다. PTSD의 일반적인 증상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 다. 원인이 된 사건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재경험', 사건에 관련된 모든 것을 피하는 '회피', 사건 당시의 기억이 반복됨 으로써 심리적으로 날카로워지는 '과각성 상태'가 그것이다.
류 교수는 "지난 2003년 발생한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생존자들 가운데는 상당수가 우울·불안·불면 등의 증상 과 함께 당시의 상황이 자꾸만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재 경험, 지하철 자체를 이용하지 못하는 회피 증상을 보였다" 며 "대개 몇 년이 지나도 이 같은 증상 중 일부는 지속되어 지하철을 아예 타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이와 유사한 예로 심각한 화재를 겪은 환자들은 타는 냄 새 자체를 기피해 음식 냄새를 전혀 맡지 못하거나 연기가 피어오르는 굴뚝을 바라보는 것조차 힘들어 굴뚝을 사용하 지 않는 나라로 이민을 가는 사례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PTSD는 충격 직후 곧바로 증상이 나타나기도 하고 수일에서 수년이 지난 후에 발병하기도 한다.
임상학적으로 보면 짧게는 일주일에서 길게는 30년 이후에도 가능하다. 단, 사고 후 약 한 달까지는 PTSD 증상들이 흔하게 나타날 수 있는데 의사들은 이때의 증상을 급성스트레스장애 (Acute Stress Disorder, ASD)로 분류한다. 그러나 그 이 후에도 증상이 사라지지 않고 한 달 이상 지속될 시엔 명백 한 PTSD 진단이 내려지게 된다.
편도체는 활성, 대상회는 둔화
PTSD 환자들이 겪는 물리적 변화는 뇌에 고스란히 나타난 다. 뇌영상 기법을 활용한 여러 연구들을 살펴보면 PTSD 는 비교적 일관된 결과를 보이고 있는 것. 구체적으로 PTSD의 증상과 밀접하게 관련된 부위는 우 리 뇌의 안쪽에 위치한 편도체(amygdala)다.
감정 및 본능 의 근원지인 대뇌변연계(limbic system)의 한 부위인 편도 체는 공포에 대한 반응을 프로세싱한다. 한 마디로 감각기 관들이 보내온 신호들로부터 위험요소를 판별하고 필요에 따라 불안 등의 감정을 느끼게 하는 장본인이다. 때문에 편도체가 망가지면 공포 자체를 느끼지 못한다.
한 실험에서는 의도적으로 편도체를 손상시킨 쥐가 마구잡 이로 고양이에게 덤비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정상 상태라면 이렇게 편도체에서 촉발된 과도한 분 노나 불안은 전두엽 한가운데 위치한 대상회(anterior cingulate)라는 부위에서 적절한 상태로 조절된다.
편도체 인근의 해마(hippocampus)도 공포 조절 처리에 관여한다. 이들의 노력 덕분에 우리는 공포를 느끼더라도 일정한 시간 이 지나면 이내 그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 PTSD 환자들에게서는 대상회와 해마의 기능 둔화 현상이 관측된다.
류 교수는 "대구 지하철 화재 참 사 생존자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대상회의 신경섬유 연 결성, 혈류량, 대사활성 감소가 확인됐고 해마에서도 대사활 성이 줄어든 모습이 관찰됐다"고 밝혔다. 즉 PTSD 환자들 은 공포감을 조장(?)하는 편도체는 활성화 된 반면 이의 통 제와 교정을 담당하는 부위들의 기능은 약화된 것이다. 이러한 상태는 PTSD의 구체적 증상과도 직접적 관련이 있다.
뇌의 활동이 곧 몸의 생리적 반응으로 나타나는 셈이다. 실제로 편도체는 대뇌와 중뇌 사이에 있는 간뇌의 일 부로서 시상(thalamus)의 아래쪽에 위치한 시상하부 (hypothalamus)와 연결돼 있는데 시상하부는 대뇌변연 계의 다른 구조물들과 함께 감정 반응을 일으킨다.
심장 박동을 조절하는 자율신경계를 자극, 신체 반응을 유도 하고 스트레스 호르몬으로 불리는 글루코코르티코이드 (glucocorticoid)의 분비를 조절하는 역할을 하는 것. 공포를 느끼면 이런 일련의 활동은 훨씬 활발해진다. 자율신경계의 교감신경이 극도로 활성화되면서 심장이 빠른 속도로 박동하며 글루코코르티코이드가 다량 분비된다.
참고로 공포 상황에서 방출되는 호르몬은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분비되는 호르몬과 동일한 종류여서 공포가 지속됐 을 때의 증상은 끊임없는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나타나는 증상과 거의 유사하다고 보면 된다. 이처럼 교감신경이 활성화 되면 인체에서는 '투쟁-도피 반응(fight-or-flight response)'이 일어난다. 혈류량이 늘 면서 혈압과 심박이 높아지고 동공이 확장되며 소름이 돋 기도 한다.
이는 어떤 위협이 가해졌을 때 그 에 대응해 싸우거나 도피함으로써 상 황을 극복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를 갖 추는 것이라 할 수 있다. PTSD 환자들의 경우 이 인체 반응이 적절히 제 어되지 못하기 때문에 폭주가 일어나 극도의 두려움 에 빠져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결과, 잠을 설치거나 신경이 쇠약해지는 등 온갖 불안 증세에 시달리게 된다.
약물치료와 인지행동치료 병행
오늘날 PTSD 치료는 다른 정신질환과 마찬가지로 약물치 료를 중심으로 인지행동치료를 병행하는 것이 정석이다. 외 상의 원인이 다르다 하더라도 치료 방식은 거의 비슷한 셈. 약물로는 항우울제와 항불안제가 주로 쓰이는데 이중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저해제(SSRI)'라는 항우울제가 우 선적으로 고려된다.
세로토닌(serotonin)은 중요한 두뇌화 학 물질 중 하나로서 그 분비량이 적어지면 우울증 등 다양 한 정서행동장애를 일으킬 수 있어 SSRI를 통해 세로토닌 활동을 강화하려는 조치다. 이밖에 세로토닌 노르에피네프린 재흡수 차단제(SNRI) 등을 포함한 새로운 계통의 항우울제, 기분안정제도 일부 증상에 효과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PTSD 환자에게 이 같은 항우울제를 처방하는 이유에 대해 류 교수는 "PTSD 가 우울증을 유발하는 부분도 고려된 것이지만 그보다는 궁극적으로 이들 약물이 뇌의 신경전달물질에 작용, PTSD 증상을 호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약물 치료과 함께 병행되는 인지행동치료는 환자의 인지 행동적 원인을 찾아 개선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류 교수 는 "환자들의 경우 자신이 맞닥뜨린 위기상황을 실제보다 극대화해서 해석하는 한편 자신의 능력은 평가절하 하는 특징이 있다"고 말했다. 가령 동물원에서 사자를 보더라도 사자의 살상력은 필요 이상으로 크게 인식하 고 자신의 방어능력은 보잘것 없다고 판단, 극심한 두려움을 느낀다.
사자가 철창을 뚫고 나 와 사람을 해칠 가능성이 거의 없음에도 말이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의사들은 주 로 환자에게 일상생활에서 특별히 무 서움을 느꼈던 상황 등을 기술하도록 하여 공포의 대상을 확인하고 교정 작업에 들어간다. 해당 상황이 두려움을 느낄 만한 상황이 아니었음을 상기시켜주는 방식으로 심리적 안정을 유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지행동치료는 여러 명의 환자들이 함께 모여서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일주일에 1 시간 30분 정도씩 총 10회 과정으로 진행된다. 그렇다면 PTSD가 완치될 확률은 얼마나 될까. 류 교수 는 "약물치료와 인지행동치료는 모두 증상 감소에 효과적 인 것이 입증됐지만 외상 사건의 종류와 강도, 횟수에 따라 예후에는 차이가 있다"면서 "치료를 받은 환자와 그렇지 않 은 환자를 비교 분석한 논문에 의하면 전자의 경우에서 장 기 예후가 훨씬 좋은 것을 알 수 있다"고 전했다.
아울러 그는 "외상 사건의 심각도나 반복성 등에 따 라 다르지만 PTSD 증상이 만성화 되는 사례도 상당수" 라며 "사건 후 10년 이상이 지나도 증상을 보이는 비율이 15~30%에 달한다는 보고도 있다"고 덧붙였다.
전 세계에서 관련 연구 진행 중
지금으로선 약물치료와 인지행동치료가 최선이다. 그 외에 학계에서 인정받은 치료법은 사실상 전무하다. 다만 혁신적 인 치료법을 찾기 위한 연구는 전 세계에서 지속적으로 이 뤄지고 있다.
국내에서는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생존자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가 대표적이다. 지난 2007년 서울대와 가천의대를 비롯한 국내 대학 공동 연구팀이 수행한 이 연구에서 연 구자들은 사고 생존자 중 PTSD로 진단된 19명을 대상으로 단광자방출단층촬영(SPECT)을 수행, 뇌의 혈류량을 측정 했다.
그 결과 시상으로 흐르는 혈액량이 일반인에 비해 줄 어들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시상은 후각을 제외한 청각, 시각, 촉각 등 인체의 감각 신경이 경유하는 부위다. 연구팀은 이를 놓고 환자들이 극심한 충격을 겪는 과정 에서 뇌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자기방어 전략을 가동 하는 것이라 해석했다.
뇌가 외부의 자극을 보다 약하게 느 끼기 위해 감각신경이 경유하는 시상으로 가는 혈액을 줄여 시상의 활동을 억제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를 바탕으로 연 구팀은 시상을 조절해 PTSD 환자의 치료에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이 밖에도 흥미로운 연구들은 더 있다. PTSD가 과거의 고통스런 기억으로 인해 나타나는 질환임을 감안, 이들 기 억을 아예 뇌에서 제거하는 방향으로 치료 가능성을 타진 하는 연구가 대표적이다.
이와 관련 미국의 한 연구팀은 뉴런의 끝부분에 존재하 는 PKMzeta 효소와 ZIP이라는 물질이 각각 뇌의 기억 유 지와 상실에 관여한다는 점을 밝혀내고 기억 제거에 활용하 는 연구를 수행 중이다.
또한 브라질의 한 연구팀에서는 뇌 에서 분비되는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이 단기기억을 장기 기억으로 저장한다는 점에서 약물로 도파민의 활동을 억제 하면 단기기억의 장기기억 고착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는 내 용을 발표한 바 있다. 이들 연구는 현재 쥐 실험을 진행 중 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기억 제어 연구는 기껏해야 동물실험 을 통해 증명된 사실들이다. 게다가 이것이 인간에게도 동 일한 효과를 보일 것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기억 제 어의 개연성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아직까지는 언제가 될지 모를 미래의 기술인 셈이다. 류 교수 역시 "현재는 기억 이 어떻게 형성·저장·출력되는지 조차 정확히 알 수 없는 단계"라며 "특정 기억을 제어 혹은 소거하는 일은 아마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나 가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인류 공동의 문제로 부상
현재 얼마나 많은 이들이 PTSD로 고통 받고 있는 것일까. 지난해 통계청에서 발표한 사회지표에 따르면 우리나라 전 체 인구 4,800만여명 중 한번이라도 PTSD에 걸린 적이 있는 사람은 58만명 가량인 것으로 집계됐다. 또 매년 33만명 가량의 환자가 새로 발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2009년 서울대 정신과 조맹제 교수팀이 정신병원 과 수용시설에 입소한 환자들을 제외한 18~64세 사이 성인 6,510명을 대상으로 전국적인 역학조사를 실시한 결과에서는 PTSD의 평생 유병률이 1.2%로 조사됐다.
또 1년 유병률 도 0.7%나 됐다. 적어도 이 결과만을 놓고 보면 우리나라 국 민 100명당 1명이 평생에 한 번은 PTSD에 걸릴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외국의 연구 결과도 있다. 지난 2001년 유럽 정신장애 역학연구(ESEMeD) 결과, 평생 유병률과 1년 유병률이 각각 1.9%와 0.9%로 집계됐으며 미국의 병존 증조사(NCS-R)에서는 각각 6.8%, 3.5%로 조사됐다.
류 교수는 "국가별 유병률 수치가 조금씩 다른 것은 정신적 외상과 PTSD 증상에 대한 이해도가 다르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며 "실제로는 조사에서 나타난 것보다 유병율이 더 높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최근 수 년 사이 전쟁, 테러 등 전 세계적인 재난이 급증하면 서 PTSD 환자도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이에 따라 PTSD는 우 리 사회와 인류가 함께 대처 해야 할 공동의 문제로 부상 하고 있다. 류 교수는 "각종 폭력과 국 가적 재난 사태에서 피해자들을 조기에 도움으로써 향후 PTSD로 의 이환(罹患)을 예방할 수 있는 지 원 체계 확립이 요구된다"며 "PTSD 의 효과적 예방·치료법 개발을 위한 기초 연구에도 많은 투자가 필요하 다"고 강조했다.
박소란 기자 psr@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