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앞으로라도 교훈을 얻을 수는 있을까.
STORY BY EDWARD TEN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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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4월 15일은 타이타닉호 침몰 100주년이다. 이 날은 엔지니어들이 이룩한 놀라운 기술적 발전을 기념하기에 제격이다.
그러나 올 1월 이탈리아 서해안 토스카나 질리오섬 인근에서 좌초해 32명의 사망자와 실종자를 낸 코스타 콩코르디아호 사고가 방증하 듯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사고의 위험성은 상존한다. 그리고 이번 사고를 보며 이런 의문도 든다. 지난 100년간 이룬 혁신적 조선공학 기술 발전에도 불구하고 왜 선박의 난파를 막지 못하는 것일까.
필자의 대학원 스승인 윌리엄 H. 맥닐 박사 는 1989년 발표한 '인간사의 제어와 재앙'이라는 소논문에서 이와 비슷한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비록 그가 논문에서 초점을 맞춘 것은 선박의 침몰이 아닌 경제의 침몰이었지만 말이다.
이 논문이 집필될 당시 미국 정부는 저축과 대출 문제로 촉발된 경제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미국경제는 짧게 잡아도 1873년부터 일련의 금융·통화 위기를 겪어왔음에도 관계당국은 100년 넘도록 이 같은 위기를 막아낼 경제시스템 구축에 실패한 것이다. 사실 각국 정부들은 경제 공황이나 시장붕괴가 벌어질 때마다 강도 높게 문제점을 개선한다. 하지만 개선이 잘 이뤄져도 언젠가 또 다른 경제위기가 찾아온다.
맥닐 박사는 이것을 어설픈 경제구조 개선의 결과로 보지 않았다. 경제구조 개선은 상당히 잘 이뤄졌지만 그 과정에서 몇몇 잠재적 위험요소를 덜 조직화된 영역으로 보내면서 다음 번에 불거질 위기의 불씨를 남겨둔 것이 원인이라는 설명이다. 그의 판단은 이랬다.
"인간 활동에 대한 정밀한 조직화와 생산 효율성의 향상을 통해 얻어지는 모든 이득들은 그만큼의 새로운 붕괴 위험성을 만들어내는 게 거의 확실해 보인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에너지 보존의 법칙과 같은 재난 보존의 법칙이 성립될 수 있다."
재난 보존의 법칙은 중세 대성당의 건축 과정에서도 드러난다. 당대의 건축가들은 더 크고, 자연채광과 통풍이 뛰어난 성당을 짓기 위해 신공법을 개발해 적용했는데 이 조치가 전에 없던 새로운 위협을 불러오는 경우가 많았던 것.
일례로 프랑스 보베에 있는 생 피에르 대성당의 건축가들은 세상에서 제일 높은 성당을 원했다. 그래서 당시의 최첨단 기술인 '플라잉 버트레스' 공법을 적용했다. 이는 분명 엄청난 기술 혁신이었지만 예기치 못한 구조적 결함이 있었다. 때문에 완공 후 10여년이 지난 1284년 폭풍에 의해 성당의 성가대석 일부가 붕괴됐으며 플라잉 버트레스 공법의 구조적 결함에 대한 학문적 연구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엔지니어들이 환경을 성공적으로 바꿔 놓았을 때도 재난은 다시 찾아온다. 미시시피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 강기슭에 쌓은 제방이 그 실례다. 이 제방 덕분에 범람의 빈도는 대폭 줄었지만 유속이 빨라지면서 제방 붕괴 혹은 제방마저 범람했을 때의 피해는 훨씬 커졌다.
해양사고에서도 이와 유사한 3가지 트렌드를 엿볼 수 있다. 안전성 제고를 위해 도입된 시스템이 승무원의 오판에 의해 위험을 초래하거나 우수한 공학기술이 과거에 없었던 약점을 만들어 내는 것, 그리고 최신 선박에 채용되는 크고 복잡한 시스템이 위기상황에서 문제를 악화시키는 상황이 그것이다.
타이타닉호의 경우 이 3가지 모두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며 발생한 비극이라 할 수 있다. 선박이 건조된 1907년 타이타닉호의 에드워드 스미스 선장은 이렇게 선언했다.
"이 선박을 침몰시킬 수 있는 그 어떤 상황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요즘 시각에서 보면 비극적일만치 우둔한 판단이었지만 스미스 선장은 충분히 그럴만한 근거가 있었다. 1907년 독일의 대형 여객선 크론 프린츠 빌헬름호가 빙산과 충돌하고도 경미한 손상만 입은 채 귀환한 적이 있을 정도로 거대한 강철 소재 선박의 안전성은 탁월한 것으로 인식됐던 것이다. 하지만 20세기 후반 수중탐사로 알아낸 바로는 타이타닉호의 철판은 빙산 충돌에 의해 파괴된 것이 확실하다.
더구나 설계자들과 선장은 선박의 크기가 클수록 생존성이 강해질 것으로 믿었지만 진실은 달랐다. 이는 오히려 위험성을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해양법의학자 필립 심즈 박사가 최근 밝힌 바에 따르면 타이타닉호는 빌헬름호 보다 3배나 컸고, 속도 또한 30% 빨랐다는 점에서 빙산 출돌 시 받은 충격에너지가 빌헬름호의 5배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침몰이 시작된 뒤에도 타이타닉호의 큰 덩치는 사태를 악화시키기만 했다. 통로가 너무 긴 탓에 승객들이 구명보트에 신속히 도착하지 못하면서 많은 구명보트들은 정원의 절반만 채운 채 바다에 내려졌다.
물론 사고 이후 많은 점들이 개선됐다. 모든 선박의 24시간 무전 청취가 의무화되기 시작했고 1913년 국제해사기구(IMO) 회원국들은 선박의 탑승정원 숫자만큼 구명보트를 비치해야 한다는 해상인명안전협약(SOLAS)을 맺었다. 빙산 감시를 위한 국제해빙순찰대(IIP)가 창설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재난의 개연성은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많은 구명보트를 싣게 되면서 일부 선박들은 안정성을 잃었다. 미국의 유람선 이스트 랜드호는 이 때문에 1915년 시카고강에서 전복 돼 승객 844명이 사망했다. 과적상태였던 선박이 무게중심을 잃고 쓰러져 버린 것이다.
플라잉 버트레스 (flying buttress)
외벽과 떨어져서 경사진 아치형으로 외벽을 받치는 옥외 구조물. 고딕 건축물의 독특한 양식 중 하나다.
새로운 설계는 새로운 위험요인을 몰고 올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놀랍게 코스타 콩코르디아호도 이와 같은 몇몇 오류를 범했다. 크루즈선 업계는 1980년대부터 이어져 온 대형 경흘수선의 안전기록을 소리 높여 강조해왔다. 그리고 이들은 대중 여행 시대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승객과 승무원 4,200명을 태운 채 좌초한 코스타 콩고르디아호는 대형 경흘수선 중 최대의 선박이 아니다. 선장은 경험이 풍부했으며 동료들로부터 인정받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안전운항이 계속되자 타이타닉호의 승무원들이 그랬듯 방심의 늪에 빠졌다. 일부 목격자들에 의하면 선박이 암초에 충돌하던 순간 선장은 선교에서 승객들과의 잡담에 여념이 없었다고 한다.
또 타이타닉호의 스미스 선장처럼 그도 뒤늦게 탈출 명령을 내려 비난을 받았다. 이는 선박 자체의 회복능력을 너무 믿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그로 인해 선박이 기울기 시작하기 전 1시간을 의미 없이 날려버렸고 구명보트의 절반은 사용해보지도 못하고 수장됐다.
아직까지 생 피에르 대성당이나 타이타닉호의 사례에서처럼 코스타 콩코르디아호가 건조 과정에서 일반적 수준을 뛰어넘는 응력을 받았을 때 발생할 수 있는 결함이 생겼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최소한 암초로 인해 외피가 50m나 찢겨도 견딜 수 있을 정도로 강하게 설계되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이 호화 유람선도 너무 큰 덩치가 피해를 키웠다. 타이타닉호와 마찬가지로 비상상황에서 승객들이 탈출로를 쉽게 찾지 못한 것. 코스타 콩코르디아호의 설계사들은 이 문제를 인식하고 첨단 탈출 역학 소프트웨어 를 활용, 내부를 설계했으며 가장 구석진 선실에도 탈출구를 만들었다. 그렇지만 스코틀랜드 스트래스 클라이드대학의 해양안전학 교수인 드라코스 바살로스 박사는 최근 'USA 투데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크루즈선의 내부는 너무 복잡해요. 때문에 같은 선박이라도 실험을 했을 때와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했을 때, 실제 사고가 일어났을 때의 결과는 항상 다르게 나타나죠. 심지어 시뮬레이션 결과조차 매번 다른 것이 현실입니다."
경흘수선(輕吃水船) - 얕은 물에서 이동할 수 있는 선박.
엔지니어들은 재난에 대처할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완벽하지는 못해도 물리적 충격을 견뎌낼 구조로 선박을 설계한다면 유사시 수천 명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 코스타 콩코르디아호 사고에서 대다수 승객들이 큰 부상을 입지 않고 구조된 것이나 타이타닉호에서 적잖은 승객들이 탈출할 시간을 번 것도 내충 격성이 강했기 때문이다. 퇴선 명령이 더 빨리 내려졌고 구조작업이 더 신속히 전개됐다면 더욱 많은 인명을 구할 수 있었을 테지만 말이다.
어쨌든 해양사고의 역사를 되짚어 볼 때 엔지니어들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새로운 설계는 언제나 새로운 위험요인을 몰고 올 수 있다는 부분이다.
루이스 캐럴의 소설 '거울을 통하여'에 등장하는 붉은 여왕의 말을 빌리자면, 제자리에 있고 싶다면 죽어라 뛰어야 한다. 세상은 변하기에 현실에 안주하면 뒤쳐질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