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영국 디자인산업의 변화와 혁신

정경원의 ‘디자인 이야기’<br>영국의 디자인에는 ‘세련미’와 ‘품격’이 담겨 있다. 영국이 세계 최고 디자인 역량을 갖게 된 데에는 어떤 노력과 혁신의 힘이 작용했을까? 정경원 카이스트 디자인학과장

여왕과 대공, 황태자와 공주, 왕궁과 근위병 교대식…. 영국은 과거의 잔재들을 전통으로 이어가는 ‘노대국(老大國)’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2012 런던올림픽의 개·폐막식에선 창의적인 콘텐츠를 끊임없이 생산하며 세계의 대중문화를 이끌어가는 역동적인 나라라는 사실도 분명히 보여주었다. 실제로 영국은 1960년대 최초로 미니스커트를 유행시킨 메리 콴트, 불멸의 히트곡으로 세계인들을 열광시킨 비틀즈, 반지의 제왕과 해리 포터를 쓴 존 톨킨과 조앤 롤랭 등 무수히 많은 창의적인 예술가들을 배출해왔다.
그렇다면 디자인 분야는 어떨까? 영국의 명물 런던 아이와 밀레니엄 돔, 최고의 품격을 가진 롤스로이스, 날개 없는 다이슨 선풍기, 유행을 타지 않는 버버리 코트 등 영국을 대표하는 상징에는 여지없이 영국다운 ‘세련미’와 ‘품격’이 담겨 있다.

디자인으로 무역 역조를 타개하다

훌륭한 디자인이 제품의 경쟁력을 높여 수출 증대에 이바지할 수 있다는 사실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1830년대 영국에선 기술력이 크게 앞섬에도 불구하고 영국 제품, 특히 섬유류의 디자인이 조악하여 프랑스 제품과 경쟁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문제가 정치적인 쟁점으로 대두되었다. 1832년 로버트 필 Robert Peel 의원이 영국 의회에서 한 연설에 그런 실정이 잘 나타나 있다. “좋은 원자재를 가져와 최고의 방적기계를 사용해 만드는 영국제 섬유보다 프랑스제가 선호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디자인 때문입니다. 만성적인 무역 역조를 해결하려면 우리의 디자인 수준을 높여야 합니다.” 반면 프랑스는 루이 14세 때부터 섬유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정책적인 지원을 제공했다. 특히 섬유의 고급화와 디자인을 이끌어 나갈 인재 양성에 적극 나서 1830년 무렵에는 프랑스에 디자인 학교가 80개나 운영되고 있었다. 영국에는 그런 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디자인 역량이 떨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영국은 이런 현실에 미온적으로 대처했다. 무역 역조 개선을 위한 영국 정부의 대책도 고작 관세 인상 정도였다. 섬유제품에 높은 관세를 부과하면 수입이 억제될 것이라 기대했지만 그 결과는 참담했다. 프랑스제품의 가격이 높아지자 밀수(密輸)로 큰돈을 벌어보자는 한탕주의가 만연했다. 그리고 이런 문제를 본질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나선 인물이 필 의원이었다. 그의 제안에 따라 구성된 셀렉트 위원회(Select Committee)는 1835년 세 가지 해결방안을 제시했다. 첫째, 디자인의 중요성에 대한 대중의 인식과 취향을 높이기 위해 훌륭하게 디자인된 제품을 수집·전시하는 박물관을 건립한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디자인 인재를 양성할 디자인 사범학교 설립, 셋째는 영국 제품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과시할 만국박람회를 개최한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빅토리아 & 알버트 박물관(Victoria &Albert Museum·V&A)과 왕립미술대학(Royal College of Art)이 설립되었고, 1852년에는 대영박람회(EXPO의 효시)가 개최되어 영국 디자인 발전의 초석이 마련되었다. 훗날 필 의원은 대영제국의 수상을 역임하며 많은 업적을 남겼다.

디자인으로 삶의 질을 높여라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영국인들은 최악의 삶을 살았다. 치열한 전쟁으로 식량은 물론 생활필수품 생산조차 원활하지 못했고, 지하 방공시설 등에서 변변한 가구조차 없이 목숨만 이어가는 생활을 했다. 1944년 영국을 비롯한 연합군의 승리로 종전이 다가오자, 윈스턴 처칠 정부는 전후 재건에 산업디자인을 적극 활용하기 위한 정책을 수립했다. 폭격으로 부서진 주택과 가구들을 재건하는데 산업디자이너들의 기여가 중요하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1944년 국가적 차원에서 디자인을 진흥할 산업디자인협의회(Council of Industrial Design·CoID)가 구성되었다. CoID는 전후 복구사업에 산업디자이너들이 적극 참여하게해 사회적으로 디자인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특히 대영박람회 100주년이 되던 1952년에는 ‘대영 페스티벌(The Festival of Britain)’을 개최해 영국의 기술과 디자인의 우월성을 전 세계에 과시했다. 1970년 CoID 는 엔지니어링 디자인 등 여러 디자인 분야들을 종합적으로 아우르기 위해 디자인협의회로 이름을 변경했다.

디자인하지 않으면 몰락한다

1970년대에 이르자 영국은 ‘세계의 공장’에서 이른바 ‘영국병 환자’로 전락했다. 임금 인상과 근로 조건 개선을 앞세운 파업 노동자들의 과도한 요구에 밀려 인플레이션이 가속화되고 모럴 해저드가 심화되고 있었다. 영국 제품의 경쟁력 또한 급속하게 떨어졌다. 대신 그 빈자리를 일본제품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위기를 느낀 마가렛 대처 정부는 1979년 디자인 진흥으로 상황을 극복한다는 전략을 추진했다. 대처 수상이 앞장서서 ‘디자인하지 않으면 몰락한다 (Design or decline)’는 캐치프레이즈를 강조해 디자인 산업을 육성하고 디자인 교육의 수준을 높인 결과 영국은 다시 디자인 종주국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1997년 집권한 토니 블레어 수상의 노동당 정부는 ‘멋진 영국 (Cool Bratain)’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영국을 세계의 ‘디자인 공장’으로 육성하기 위해 디자인협의회의 활동도 적극 지원했다. 그리고 2007년 고든 브라운 수상이 정부 부처를 개편하면서 디자인 진흥 정책이 다원화되었다. 디자인 권리(design right) 보호와 중소 기업의 디자인을 지원하는 업무는 ‘혁신, 대학 및 기술부’가 전담하고, 디자인을 창의 산업으로 육성하는 업무는 ‘문화, 매체 및 스포츠부’ 가 책임을 맡았다. 영국은 두 부문의 시너지를 얻기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현재 영국 디자인산업의 총 매출 규모는 150억 파운드(약 25조5,000억 원)에 달한다.

세계 디자인계를 이끄는 리더십

영국은 산업혁명 이래로 세계의 디자인을 이끌어 왔지만, 디자인을 적극적으로 육성한 정치지도자는 한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다. 이는 곧 선견력 있는 지도자들만이 디자인의 가치를 삶의 질과 국가 경쟁력 향상에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국 정부가 앞장서서 추진한 주요 디자인 진흥 정책과 이벤트들은 지금 세계로 널리 전파되고 있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일본, 타이완, 말레이시아 등 주요 국가들이 디자인협의회와 유사한 진흥기관 을 운영한다. 2003년부터 해마다 V&A를 중심으로 런던 전역에서 열리는 ‘런던 디자인 페스티벌’도 여러 나라로 전파되었다. 특히 메인 행사인 ‘100% 디자인 런던’은 도쿄, 싱가포르, 상하이 등 여러 도시로 확산되고 있다. 영국 출신 디자이너들도 세계적으로 크게 활약하고 있다. 다이 슨의 제임스 다이슨 회장, 애플의 조나선 아이브 부사장, 삼성전자 의 고문을 지낸 재스퍼 모리슨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이 해외에서 벌어들이는 수입은 한 해에 약 8억 파운드(약 1 조5,000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 영국 정부는 디자인을 ‘글로벌 산업’으로 육성해 국제 교역 의 활성화와 지식재산의 증식 수단으로 활용한다는 전략을 수립했다. 공해와 범죄 예방은 물론, 노령화 등 사회적인 문제도 디자인으로 해결한다는 노력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영국 정부는 200여 년 동안 디자인의 새로운 역할 모색과 전략적 활용으로 세상의 변화에 적극 대응하는 노력을 해왔다. 이 같은 영국의 사례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아직도 디자인을 미술의 한 부분으로, 인공물에 겉치레나 장식을 부가하는 활동으로 여기는 근시안적인 풍조가 불식되기를 기대해본다.


정경원 교수는…

한국 디자인 진흥원장을 역임한 정경원 교수는 국내 산업디자인 분야를 대표하는 최고 전문가 중 한 사람이다. 서울시 문화관광디자인 본부장(부시장)을 지냈으며 현재 카이스트 산업디자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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