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세계 3위 부자를 만나다

게이츠 Gates 와 슬림 Slim *역주: 멕시코 통신재벌뒤를 이어 세계 최고 부자 순위에 이름을 올린 인물은 세계 최대 패션 제국 자라 Zara 를 건설한 아만시오 오르테가 Amancio Ortega 다. 제대로 알기는 매우 어렵고, 인터뷰도 거의 불가능하고, 사생활 공개를 극도로 꺼리는 인물이다. 포춘이 단독으로 그를 심층 취재했다. By Vivienne Walt

스페인 북부 라 코루냐 La Coruna의 한 교통신호등 앞에 있는 검은색 링컨 타운카 옆으로 오토바이 한 대가 굉음을 내며 멈춰 섰다. 차 안에 탄 남 자는 오토바이를 몰던 젊은이가 핸들에 기댄 모습을 차창 밖으로 내다보고 있었다. 젊은이는 70년대 복고풍의 아플리케 패치 appliqued patches를 덧댄 청재킷을 입고 있었다. 젊은이보다 수십 년 연상인 타운카 안의 남자는 그 재킷에 주목했다. 그리고 바로 휴대전화를 들어 사무실에 있는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젊은이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재킷의 바느질, 모양, 색깔 등을 묘사한 후 단 한마디 지시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아세디아 ¡Hacedla!” 그대로 만들라는 말이었다.
신호가 녹색으로 바뀌고 젊은이가 탄 바이크는 멀어져 갔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와 그의 재킷이 우리 시대 가장 위대한 ‘소매 신화’에서 중요한 단역을 맡은 셈이었다.
차 안에 있던 아만시오 오르테가 가오나 Amancio Ortega Gaona는 지구상에서 세 번째로 돈이 많은 부호다. 인디텍스 그룹 Inditex Group의 창업주인 오르테가(76)는 바람이 휘몰아치는 스페인 서북부 해안의 갈리시아 Galicia 지방 라 코루냐.인구 24만 6,000명의 소도시다.에서 오랫동안 대중의 관심을 피해가며 살아 왔다. 인디텍스의 대표 브랜드 자라에서 쇼핑하는.그래서 오르테가를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부자로 만든.단골 고객들 중에서 그의 이름을 들어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오르테가는 공개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기를 꺼리고 (이 기사의 인터뷰를 포함해) 모든 인터뷰 요청을 거부함으로써 은둔 생활을 고수해왔다. 1999년이 돼서야 그의 사진이 언론에 처음 공개됐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오르테가는 파리, 밀라노, 뉴욕의 화려함과는 동떨어진 곳에서 전 세계 80여 개국을 아우르는 패션제국을 건설했다. 그는 40년 전에 이미 수십 년간 유럽의 유수 패션업체들이 구축해 온 비즈니스 모델을 파기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지금까지 패션업계에서 가장 무섭도록 빠른 회전율 스케줄을 도입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자라는 세계 최대 패션 소매업체로 자리매김했다.

오르테가는 두 가지 원칙을 바탕으로 자신의 제국을 건설했다. 소비자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라.그리고 이를 누구보다 빠르게 제공하라.이 양대 원칙 때문에 회사는 물론, 그 자신도 독특한 인습타파자가 됐다. 그의 비즈니스는 전통적인 소매상이라기보단 최적화된 공급망에 가까웠다. 그리고 이 원칙들은 인디텍스가 거둔 경이로운 성공의 비밀이기도 하다. 런던 소재 바클레이즈 캐피털 Barclays Capital의 소매업 전문 애널리스트 크리스토두로스 차비아라스 Christodoulos Chaviaras는 “현재로선 인디텍스와 겨룰 만한 회사가 거의 없는 상황이다. 인디텍스는 다른 회사가 아닌 자기 자신과 싸우고 있다”고 평가했다. 의류 소매업체 유니클로 Uniqlo의 창립자 야나이 다다시 Yanai Tadashi 는 자라를 이기는 것을 필생의 목표라고 밝히기도 했다. 지난해 8월 인디텍스의 전임 유통 및 사업부 책임자가 에스프리 Esprit의 CEO에 선임되자 그날 회사 주가가 28%나 폭등할 정도였다. 스페인은 24%에 이르는 고실업률과 심각한 부채를 안고 있는 등 몇 세대에 한 번 있을만한 최악의 불황을 겪고 있다. 하지만 인디텍스 입장에서 보면, 이런 위기가 마치 화성에서 벌어지는 것처럼 멀게만 느껴진다. 스페인 패션 디자이 너 협회(Spanish Association of Fashion Designers) 회장을 맡고 있는 모데스토 롬바 Modesto Lomba는 “이들은 딴 세계에 살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인디텍스의 CEO 파블로 이슬라 Pablo Isla는 3분기까지 회사 매출이 전년 대비 17% 늘어났고.9개월간 판매 수익은 146억 달러에 달했다.순익은 2010년과 같은 271만 달러라고 발표했다. 지금까진 성장이 둔화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그들은 아만시오가 어릴 때 라 코루냐로 이사해 철길에 인접한 연립주택에서 살았다. 이곳은 당시나 지금이나 철도 노동자들의 숙소로 쓰이고 있다.

인디텍스는 2011년 83만 5,000벌의 의류를 생산했다. 매일 평균 한 개씩 새로운 자라 매장이 문을 열고 있다. 얼마 전에는 인디텍스의 6,000번째 매장이 런던의 옥스퍼드 가에 오픈하기도 했다. 현재 미국에 46개, 중국에 347개, 스페인에 1,938개의 자라 매장이 있다. 인디텍스 지분 59%이상을 보유한 오르테가는 지난해 7월, 워런 버핏을 제치고 카를로스 슬림 엘루 Carlos Slim Helu와 빌 게이츠에 이어 세계 3대 부자의 자리에 올랐다. 고향 길거리에서 차창을 통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는 이 비밀스럽고 불가사의한 스페인 남자의 현 자산 가치는 무려 560억 달러에 이르고 있다. 오르테가의 배경을 살펴보면 그의 대단한 성공이 더욱 놀랍게 다가온다. 오르테가는 스페인 내전이 시작되던 1936년, 부스동고 데 아르바스 Busdongo de Arbas라는 인구 60명의 마을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 났다. 그의 가족은 아버지의 철도 일과 어머니의 가정부 수입으로 근근이 살았다. 그들은 아만시오가 어릴 때 라 코루냐로 이사해 철길에 인접한 연립주택에서 살았다. 이곳은 당시나 지금이나 철도 노동자들의 숙소로 쓰이고 있다. 아만시오도 열세 살 때 겪은 운명적인 사건만 아니었다면 후에 철도회사에서 일했을지 모른다. 그는 그날 학교에서 돌아오던 길에 어머니와 함께 동네 가게에 들렀다. 어머니는 가게 주인에게 외상을 해달라고 사정했다. 오르테가의 오랜 친구인 코바동가 오시어 Covadonga O'Shea는 “누군가 ‘부인, 물건을 드릴 수 없습니다. 돈을 내셔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오르테가가 들었다”고 말했다. 오시어는 현재 마드리드 Madrid 나바라 대학 교 University of Navarra에서 패션 비즈니스 스쿨을 운영하고 있다. 또 유일하게 정식 허가를 받은 전기 ‘자라에서 온 남자 (The ManFrom Zara)’를 집필했다. “아만시오는 너무 창피해서 다시는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오르테가는 십대 초반의 어린 나이에 셔츠를 만드는 ‘갈라 Gala’라는 가게에서 일을 시작했다. 이 가게는 지금도 라 코루냐 시내의 같은 장소에 있다. 격자무늬 셔츠, 어 부들이 쓰는 모자, 양모 카디건이 진열된 이 가게는 지금 보면 시간이 멈춘 듯한 곳이다. 오르테가의 경력을 취재해 온 이 지역 기자 사비에르 R. 블랑코 Xabier R. Blanco는 “믿을 수 있겠는가? 그 가게는 지금도 똑같은 물건을 팔고 있는데, 아만시오는 이제 세계 정상에 서 있다”고 말했다. 아버지 로부터 갈라를 물려받은 76세의 호세 마르티네스 Jose Martinez도 고통스러운 아이러니에 시달렸다. 그는 아만시오와 동갑으로, 열네 살 때 친구가 됐다. 두 소년은 오후에 함께 갈라에서 셔츠를 개고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돌아다니곤 했다. 마르티네스는 그의 어린 시절 친구와 비교되는 자신의 현재를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다. “여기 들어 오는 사람들 중 물건을 사려는 손님은 아무도 없다. 모두들 아만시오에 대해 알고 싶어할 뿐이다.”

그는 원래 상호를 ‘조르바 Zorba’라고 붙이고 싶어했지만 이미 다른 가게에서 쓰고 있어서 ‘자라’라고 이름을 붙였다.

열여섯 살이 됐을 때, 오르테가는 언젠가 팔릴 것이라는 기대로 재고를 사들이기 보단 손님들이 원하는 물건을 재빨리 제공해주는 편이 제대로 돈을 벌 수 있는 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려면 사람들이 어떤 물건을 찾고 있는지 파악하고, 그대로 만들어야 했다. 공급망을 통제할 필요가 있었다. 오르테가는 당시 갈리시아라는 이상적인 환경 속에서 살고 있었다. 일자리가 별로 없는 곳이라 수천 명의 남자들이 바다에 일하러 간 동안 여자들이 혼자 어려운 집안 살림을 떠맡아야 했다. ‘아만시오 오르테가: 맨손으로 자라 제국을 일구다 (Amancio Ortega: From Zero to Zara)’라는 책을 공동집필한 블랑코는 “이 지역 여성들은 돈을 조금이라도 더 벌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게다가 바느질 솜씨도 뛰어났다”고 말했다. 오르테가는 수천 명의 여성들이 참여하는 바느질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그가 처음 세운 회사 GOA는 누비로 된 목욕용 가운을 만들어 성공했다. 열네 살 때 오르테가의 회사에서 일하기 시작한 메르세데스 로페즈 Mercedes Lopez는 대부분의 여직원들이 일을 할 수 있게 돼 무척 기뻐했다고 말했다. 이제 52세가 된 로페즈는 “근무조건이 상당히 좋았었다”고 당시를 회상하기도 했다. 그녀는 현재 인디텍스의 섬유부문 노조 위원장이다. “우리는 아만시오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직원들과 매우 가까웠다.” GOA는 가족이 함께 운영하는 회사였다. 오르테가가 디자인, 형 안토니오가 사업, 누나 호세파가 회계를 맡고 있었다. 당시 GAO는 중간상을 거치지 않고 바르셀로나로에서 옷감을 직접 받아 오는 전략을 취하고 있었다.
돈을 충분히 모은 오르테가는 1975년 십대 시절 일하던 갈라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첫 가게를 열었다. 그는 원래 상호를 ‘조르바 Zorba’라고 붙이고 싶어했지만 이미 다른 가게에서 쓰고 있어서 ‘자라’라고 이름을 붙였다. 오르테가는 처음부터 속도를 동력으로 삼았고,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자라매장들은 매주 두 번 재고를 정리하고, 최대 48시간 내로만 주문을 받는다. 오르테 가는 1970년대에 이 48시간 원칙을 도입했고, 이 때문에 처음에는 라 코루냐 근처에서만 자라 매장을 열어야 했다. 매장들도 주로 바르셀로나의 직물 공장들을 오가는 분주한 트럭 전용도로를 따라 자리 잡았다. 그러나 오르테가는 회사가 성장할 때도 자신의 두 가지 원칙을 고수했다.
오르테가가 지주회사 인디텍스를 설립하고 포르투갈에 첫 해외 매장을 여는 데는 10년이 걸렸다. 포르투갈은 스페인보다 인건비가 저렴해 주저 없이 다음 생산기지로 그곳을 선택했다. 1980년대 후반에는 뉴욕과 파리에도 매장을 열었다. 1990년대 자라가 유럽 전역으로 뻗어나갈 때도 생산은 계속 본사 가까운 곳에서 이뤄졌다. 인디텍스의 대변인 헤수스 에체바리아 에르난데스 Jesus Echevarria Hernandez는 라 코루냐 외곽 아르테익소 Arteixo에 자리잡은 광대한 회사 본사에서 “우리의 뿌리는 항상 제조업에 있다”고 말했다. 전면 창을 통해 주변 농지가 한눈에 들어오는 건물이었다. “이곳에 올 때마다 우리는 ‘공장에 나간다’고 표현한다.”


그 ‘공장’은 공상과학 영화에 나올 법한 기계와 전통적인 소매상이 뒤섞인 곳으로, 오르테가의 두가지 원칙에 따라 능률적으로 조직되어 있다. 최고 속도로 재고를 끊임없이 채우고 있다. 광택 나는 흰색의 단조로운 내부는 엄청나게 큰 자라 매장처럼 생겼다. 1층 두개의 복도를 따라 개방된 공간에 자리잡은 흰색 긴 카운터에서 수백 명의 디자이너와 판매 전문가들이 일하고 있다. 이들은 자라 제국의 각 지역에 맞게 그룹을 만들어 작업을 한다. 이들이 일하는 속도는 눈이 돌아갈 정도로 빠르다. 디자이너들은 하루에 세 개의 아이템을 구상하고, 도안가들은 각각의 아이템으로 샘플을 하나씩 만들어낸다. 그 옆자리에는 각자 전문지역을 가진 사업 및 판매 전문가들이 앉아 있다. 이들은 자라 매장 매니저들의 판매 보고서를 바탕으로 고객의 취향과 습관을 분석해 어떤 물건이 잘 팔리는지,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고객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아 내려 한다. 직원들은 길거리, 클럽, 바, 레스토랑 등에서 영감을 얻는다고 한다. 이들은 모두 오르테가가 수십 년 동안 그래왔듯이, 사람들이 어떤 옷을 입고 다니는지 유심히 살펴보는 데 이골이 나 있다.
자라의 디자인 층 한쪽 끝에는 홈페이지(Zara.com)를 관리하는 소규모 팀이 있다. 이곳에선 상하이, 도쿄, 뉴욕 사무실들 과 웹캠으로 연결된 평면 모니터들이 유행을 포착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제는 나라와 도시들이 한 가지 성격만 띠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도쿄의 긴자 Ginza 지역은 다른 상업지구들보다 뉴욕 맨해튼의 소호 SoHo 지역과 더 흡사하다. 새로운 취향을 알아내는 데 집착하는 건 정말 오르테가다운 일이다. 현재 자라 위민 Zara Women의 트렌드 부문을 이끌고 있는 로레타 가르시아 Loreta Garcia.23년 전 디자인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인디텍스에 합류했다.는 “우리는 패션쇼에는 절대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녀는 “우리는 블로거와 고객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인다. 그러나 언제든지 생각을 바꿀 준비도 되어 있다”고 말했다. “오늘 정말 멋져 보이는 생각도 2주 후에는 최악의 아이디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이 모든 것을 순조롭게 돌아가게 하는 곳이 바로 물류 부문이다. 에체바리아는 “회사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이 물류 시스템 덕분에 아제르바이젠의 수도 바쿠Baku에서 호주의 멜버른 Melbourne까지 멀리 흩어진 여러 지역에서 빠른 재고 회전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40만 제곱피트(약 3만 7,000 제곱미터)에 달하는 물류 건물은길 건너 본사의 세 배 규모를 자랑한다. 5층 높이까지 이어진 루브 골드버그식 Rube Goldberg *역주: 루브 골드버그라는 만화가의 스케치에서 유래한 비유로, 간단한 일을 쓸데 없이 복잡하게 만드는 것을 가리킴 미로 같은 컨베이어 벨트를 중심으로 내부가 구성되어 있다. 이곳은 전 세계 모든 자라 매장의 개별 주문에 맞춰 물건을 배송한다. 배송 마감 기한은 유럽, 중동, 미국 대부분 지역은 24시간, 아시아와 중남미 지역은 48시간으로 엄격하게 정해져 있다.이런 독특한 방식도 오르테가다운 부분이다. 2011년 7월 파블로 이슬라에게 공식적으로 경영권을 넘겨주기는 했지만 오르테가는 여전히 회사를 관장하는 뮤즈면서 영감의 원천이자 최대주주다. 놀랍게도 오르테가는 단 한 번도 개인 집무실을 갖지 않았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돈이 많은 이 사람은 아직도 자라 위민 Zava Women의 개방된 공간 한 구석에 놓인 책상을 쓰고 있다. 오르테가는 보고서를 읽는 것보다 옷감을 만지는 것을 좋아한다. 가르시아는 그가 “마치 컴퓨터라는 게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며 “이젠 다른 임원들도 그런 방식을 취하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젊을 때 이 일을 시작해서 오르테가와 함께 성장했다.” 최근 입사한 직원들은 오르테가가 그들과 종종 색상이나 트렌드에 대해 토론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곤 한다. 가르시아는 “누구든지 오르테가에게 ‘이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물어볼 수 있다. 매우 유연한 분위기다”라고 말했다. “약속도 따로 잡을 필요가 없다.” 오르테가가 남길 유산이 무엇이냐고 CEO 이슬라에게 묻자 비슷한 대답이 돌아왔다. “기업가 정신, 자기 비판의 태도, 그리고 문화다. 이 회사는 완전히 수평적이다.”
본사에 가까워야 한다는 고집과, 하위 직원들과도 소통할 수 있는 오르테가의 능력은 한 가지 흥미로운 의문점을 자아낸다. 그가 극심한 가난 속에서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이 아니라 상류층 가문에서 태어나 MBA를 받았다면, 그의 경영 방식이 보다 수직적.그래서 덜 성공적. 이었을까? 오르테가의 비공인 전기를 쓴 블랑코는 “그는 분명히 가난 때문에 지금과 같은 인물이 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절실했다. 위대한 복싱 선수들도 모두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다.”

이제 반 은퇴한 오르테가는라 코루냐의 분주한 시가지에 위치한 저택에 살고 있다.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5층짜리 그의 집은 경비도 삼엄하지 않다. 그는 매일 아침 라 코루냐의 경영인 클럽에서 지인들과 (친구들 말에 따르면 계란과 튀김으로) 식사를 한다. 주말에는 전원 주택으로 쉬러 가 닭과 염소를 키우고 장성한 자녀들을 불러모은다. 오르테 가는 몸에 익은 습관을 지키고 살면서 매년 몇 주 동안 갈리시아의 순례자 길을 따라 하이킹을 떠난다. 평생 비행기 타는 것을 꺼려 왔기 때문에 여행은 별로 하지 않는다. 인디텍스 설립 때부터 오르테가를 알고 지낸 라 코루냐 대학 University of La Coruna 경제학과 교수 안토니오 그란디오 도피코 Antonio Grandio Dopico는 오랜 친구의 평생 철학이 “완벽하게 평범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 스페인의 상황은 전혀 평범하지 않다. 자라의 주 고객층인 20대의 실업률은 스페인 전체 평균의 약 두 배인 50%에 이르고 있다. 스페인의 경제적 고통은 라 코루냐 시내를 걸을 때도 느낄 수 있다. 상업 중심가의 상점 수십 군데는 진열장이 판자로 가려져 있다. 이런 와중에도 항구 근처 번화한 길모퉁이에 새 단장한 건물 하나가 환하게 빛나고 있다. 활기가 넘치는 이 건물은 이 도시에서 가장 큰 자라 매장이다.
자라는 거침없는 확장을 얼마나 더 계속 할 수 있을까? 유럽이 침체에 빠지자 자라는 미국과 아시아로 진출했다. 지난해 뉴욕 5번가에 자라 매장이 화려하게 문을 열었고, 9월에는 중국 홈페이지도 개설했다. 자라가 라 코루냐에서 점점 먼 곳까지 확대됨에 따라 매년 수십만 벌의 옷을 갈리시아로 다시 보내 유통시켜야 하는 현실과 오르테가의 원칙들이 충돌할 가능성도 있다.
자라는 앞으로 변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소매 거인을 탄생시킨 인물은 자수성가한 (a small-town hero) 초심을 언제나 마음 깊이 지킬 것이다. 오르테가는 맨 해튼의 한 매장 개장 행사에 참석해 손님들이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지켜본 적이 있었다. 그는 이 광경에 너무 압도돼 화장실에 틀어박혀 울었다고 한다. 그는 오시어에게 “아무도 내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 순간 내가 부모님 생각을 얼마나 했는지 상상이 가나? 스페인 북부 구석 작은 시골 마을에 서 시작해 미 대륙을 개척한 아들을 보고 얼마나 자랑스러워하셨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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