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D 프린터로 실제 발사와 살상이 가능한 권총이 제작된 것. 게다가 그 설계도가 인터넷에 공개되기까지 했다. 3D 프린터로 인한 미래 혁명은 우리 예상보다 빠르게 다가올지도 모른다.
이번 사태를 일으키며 지구촌을 떠들썩하게 만든 주인공은 미국 텍사스대학 로스쿨에 재학 중인 코디 윌슨이 설립한 비영리단체 디펜스 디스트리뷰트(defdist.org). 이 단체의 행동목표를 간단히 요약하면 인터넷에 총기의 3D 프린터용 설계도를 파일을 공개, 누구나 손쉽게 총기를 직접 제작해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일견 테러집단의 목표처럼 보이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미국을 위시한 서구국가들이 가지고 있는 총기에 대한 관념은 우리와는 매우 다르다. 그들에게 총기는 기본적으로 험난한 자연환경과 외부의 적에 맞서 삶을 지속하기 위한 도구라는 이미지가 크다. 때문에 총기 소지를 시민의 당연한 권리로 여기고 장려하는 분위기마저 존재한다. 매년 무수한 총기 사고로 무고한 인명이 희생되면서 사회적 논란이 일고 있음에도 여전히 총기의 사용이나 소지를 불법화하지 않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문제는 이들이 앞서 언급한 목표를 단순히 표방한 것을 넘어 실제 그 일에 성공했다는데 있다.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2만 달러의 자금을 모은 이 단체는 3D 프린터로 제작할 수 있는 권총을 설계, 각각의 부품을 프린팅한 뒤 조립하는 방식으로 실탄 발사가 가능한 권총을 개발해냈다. 이후 지난해 12월부터 이 권총을 이용한 사격 실험을 수행했고, 급기야 올 5월 5일 ‘리버레이터(Liberator)’로 명명된 세계 최초의 3D 프린터용 권총의 도면 파일을 인터넷에 공개했다.
참고로 코디 윌슨은 이에 앞서 지난해 12월 3D 프린터로 인쇄한 부품으로 조립된 AR-15 반자동 소총의 시험사격에 성공하는 영상을 유튜브에 올려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했다.
뜨거운 감자
ABS 플라스틱 수지를 소재로 인쇄된 리버레이터는 38구경 총알을 발사하는 단발 권총이다. 발사 구조나 메커니즘으로 본다면 제대로 된 총이라기보다는 ‘응급 총알 발사장치’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당한 수준이기는 하다. 단적인 예로 이 총에는 다수의 탄약을 저장했다가 급탄해주는 탄창이 없다. 총열에 강선은 파여져 있지만 정확성은 보증하지 못한다. 총 본체가 모두 플라스틱으로 되어 있는 만큼 금속 소재의 권총만한 내구성도 있을 리 만무하다. 권총용 총알 가운데 호신용 권총에 많이 쓰이는 비교적 약한 탄인 38구경을 사용하는 것이 그 방증이다.
미국 위스콘신에 거주하는 조라는 이름의 한 엔지니어가 디펜스 디스트리뷰트의 설계도를 내려 받아 리버레이터를 제작, 9발의 시험사격을 했는데 사격 도중 공이, 나사 등의 부품이 변형되거나 튀어나가 버렸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조잡하기는 해도 분명 총기임에는 틀림없다. 총알이라는 물건 자체가 어떻게든 뇌관만 때려주면 발사되며, 단 한발만 발사가 이뤄져도 살상이 가능하니 말이다. 올 1월호 헤드라인 섹션에 3D 프린터로 아이폰이 복제되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예견한 파퓰러사이언스조차 예상치 못한 급진적 도전이 성공해버린 것이다.
미국 현행법상 DIY 총기 제조는 불법이 아니다. 따라서 미국 내에서라면 리버레이터의 제조 행위는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사안의 심각성과 사회적 파장을 고려한 미 국무부는 지난 5월 8일 미국이 아닌 해외에서도 인터넷을 통해 설계도를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는 점을 들어 국제 무기거래 규정에 어긋난다며 웹사이트에서 설계도를 내리라고 디펜스 디스트리뷰트에 지시했다. 당연히 이 단체는 지시를 따랐지만 이미 10만회 이상 다운로드가 이뤄진 뒤였다.
지금은 진정 국면에 들어서기는 했어도 이번 일이 갖는 상징성은 그야말로 엄청나다. 3D 프린터가 단순히 가정용 인테리어 제작 기계가 아닌 세상을 뒤흔들어 놓을 뜨거운 감자가 될 수 있음이 입증됐기 때문이다.
제품 생산의 민주화
3D 프린터는 디지털 모델을 사용해 고형소재를 가지고 입체적인 물건을 만들어내는 장치다. 잉크젯 프린터와 동일한 메커니즘으로 원료를 분사해 한 겹씩 적층해나간다는 이유로 3D 프린터라는 이름이 붙었다.
물론 인간은 3D 프린터가 존재하기 이전에도 고형소재로 입체물을 제작해 왔다. 그러나 전통적인 공작 기법은 소재를 절삭하고, 구멍을 뚫는 등 조각을 하는 것에 가까웠다. 그런 탓에 숙련된 기술이 없다면 제대로 된 입체물의 제작이 매우 어려웠다.
반면 3D 프린터는 잉크 역할을 하는 원료 소재와 컴퓨터 소프트웨어로 만든 3차원 설계도만 있으면 누구라도, 어떤 형태의 물건이라도 제작이 가능하다. 그것이 심지어 어린이일지라도.
이러한 3D 프린터의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 1981년 일본 나고야시 공업연구소의 연구자였던 고다마 히데오가 원시적인 3D 프린팅 기법으로 최초의 입체물을 제작했다. 현대적 개념의 3D 프린터에 대한 기술적 기반을 확립한 인물은 미국의 연구자 찰스 헐이다. 그는 1984년 스테레오리소그래피(stereolithography)라는 입체 모델링 인쇄 기법을 창안, 1986년 특허를 획득했다.
그 후로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 웬만한 방 하나 크기에 달했던 3D 프린터가 책상 위에 올려 놓을 수 있을 정도로 소형화됐다. 활용 분야도 보석, 제화, 산업디자인, 건축, 엔지니어링, 건설, 자동차, 항공우주, 치의료, 교육, 지리, 토목 등 산업 전반으로 확대돼 있다.
3D 프린터의 최대 장점은 기존 생산방식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신속·정확한 제작이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특히 3D프린터를 활용하면 각각의 부품을 별도로 만들어서 제작해야 했던 물건도 아예 조립된 상태로 인쇄할 수 있다. 너무 복잡한 모양을 하고 있어 여러 부분으로 나눠서 만들었었던 부품도 마찬가지다. 그에 맞는 설계도만 확보한다면 말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적층 인쇄라는 점을 이용해 하나의 부품이 여러 색상을 가지도록 만들 수도, 여러 소재로 하나의 부품을 만들 수도 있다.
조립식 프라모델을 가지고 설명한다면 3D 프린팅의 효율성을 더욱 알기 쉽다. 기존의 방식으로 만들어진 프라모델은 부품을 일일이 떼어내서, 다듬고, 본드로 붙여서, 스티커를 붙이는 고된(?) 과정을 거쳐야 완성되지만 3D 프린터는 조립도, 스티커도 없이 완성품 프라모델을 인쇄해낼 능력을 갖고 있다.
이 모든 장점은 아직 제조라인이 구축되지 않아 전 공정을 수작업으로 진행해야하는 시제품을 제작할 때 두드러진다. 덕분에 신제품 개발에 투입되는 비용과 시간, 정력을 대폭 절감할 수 있다.
물론 일반인들의 입장에서 3D 프린터의 등장으로 가장 크게 체감할 수 있는 변화는 단연 제품 생산의 ‘민주화’다. 아직은 모든 물건을 제작할 수는 없지만 이론상 3D프린터는 금형이나 선반, 밀링 머신 같은 값비싼 공작 기계를 보유하지 않은 사람도 제품을 직접 만들어서 사용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가능과 불가능이 아닌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3D 프린터가 열어줄 미래
가지고 있는 잠재력이 워낙 방대한 만큼 현 단계에서 3D 프린터가 앞으로 우리에게 어떤 변화를 일으킬지 정확히 예측하는 것은 쉽지 않다. 다만 3D 프린터가 진화해 나갈 방향은 대략적이나마 추정이 가능하다.
우선 3D 프린터로 만들 수 있는 물체의 강도가 비약적으로 향상될 전망이다. 산업용 제품으로 사용해도 무방한 수준까지 다다를 것이다. 지금도 이미 3D 프린터로 제작된 부품이 항공기에 쓰이고 있는 상태며 자동차, 군수품, 전자기기 등에도 3D 프린터 부품의 적용이 늘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최근 들어 3D 프린팅 된 제품들은 인명을 구하고, 사람들의 건강을 증진시키는 데도 유용하게 쓰이기 시작했다. 뼈 임플란트, 의수족, 교정기구 등의 의료기기가 그 실례다. 원래 인체는 기계와 달리 사람마다 체격과 생김새가 모두 다르다. 일란성 쌍둥이도 예외가 아니다. 이 점에서 환자의 신체를 3D 스캔한 데이터를 토대로 의료기구를 프린팅하면 개별 환자에게 맞춤화된 제품을 저렴하고 빠르게 생산할 수 있다.
이와 맞물려 인체의 세포를 가지고 3D 프린터로 연조직을 인쇄하는 실험도 진행되고 있다. 머지 않아 3D 프린터가 만든 동맥과 정맥이 수술실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며, 언젠가는 환자 자신의 세포로 만든 인공장기를 이식받는 날도 찾아올 것이다.
또한 개별 소비자의 취향에 맞춰 제품을 개량하거나 처음부터 특정 소비자에게 최적화된 소량 주문생산이 일반화될 개연성이 높다. 지금까지 소량 주문생산은 대량생산에 비해 가격경쟁에서 밀려 기피돼 왔지만 3D 프린터의 등장으로 모든 것이 달려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향후에는 소비자가 온라인으로 자신이 원하는 사양을 입력하면, 기업이 해당 제품을 3D 프린터로 제작해 보내주는 시스템이 활성화될 수 있다. 초기에는 스마트폰 케이스, 귀걸이 같은 액세서리나 인테리어 소품이 주류를 이루겠지만 나중에는 전기밥솥, TV, 냉장고 등의 전자제품까지 그 범위가 확대될 가능성을 배재할 수 없다.
기술 혁신의 촉매제
전문가들은 또 3D 프린터로 인해 제품의 기술혁신 속도도 더욱 빨라질 것이라고 분석한다. 앞서 언급한 대로 3D 프린터는 제품의 설계개발에 드는 시간과 비용을 절감시켜 주기 때문에 개발자들이 연구개발비 걱정에서 벗어나 마음껏 창의성을 발휘하게 될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특히 이 트랜드는 3D 프린터용 설계 소프트웨어의 발전, 3D 프린터용 소재의 다양화에 힘입어 하루가 다르게 가속화될 전망이다. 기존에 없던 신소재를 사용한 혁신제품들이 대량으로 쏟아져 나올 수도 있다. 3D 프린터로만 경제성 있게 제작 가능한 제품들을 대상으로 탄소나노튜브, 인쇄 회로 등이 결합된다면 오늘날의 제품들이 상상도 할 수 없을만큼 대단한 제품들을 만들어 소비자들의 눈을 사로잡을 수 있다.
덧붙여 3D 프린팅 시장의 팽창에 맞춰 신규 비즈니스 모델이 나타날 수도 있다. 어쩌면 프린터를 갖추고 복사를 해주던 학교 앞 문방구들이 3D 프린터를 구매할 형편이 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 3D 프린터를 들여놓고 간단한 제품을 만들어 줄지도 모른다.
물론 반작용도 없을 수는 없다. 3D 프린터가 대중화되면 원 설계안의 지적재산권이 누구에게 있는지에 대한 논쟁이 뜨거워질 것이다. 기업이나 개인들이 자신의 설계안이 손쉽게 복제될 수 있음을 지각하게 되면 권익을 지키기 위해 치열한 법적 공방도 불사할 것이기 자명한 탓이다. 이는 10여년 전 개인들의 MP3 파일을 공유하는 P2P 사이트가 등장하며 음원의 불법 복제가 만연해 음반사들이 법적 대응을 한 것과 유사하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저서 ‘제3의 물결’에서 오늘날과 같은 정보화 사회의 도래를 예견했다. 정보화는 단순히 컴퓨터와 인터넷, 스마트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인간 생활의 모든 영역이 정보화의 파도를 얻어맞을 것이며, 인간이 원하는 재화를 만들어내는 제조업도 당연히 그 대상이 된다.
제2의 물결 사회, 즉 산업 사회의 소품종 대량생산 제조업은 조금씩 그 운명을 다해가고 있다. 그 자리를 다품종 소량생산 방식이 무섭게 치고 들어오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생산의 기회를 열어주는 3D 프린터는 그러한 상황을 무섭게 부추기고 있다.
21세기형 도깨비 방망이라 할 수 있는 3D 프린터가 가져다줄 미래에 기대와 우려가 교차되는 시점이다.
크라우드펀딩 (crowd funding) 소셜미디어, 인터넷 등의 매체를 활용해 다수 대중들로부터 십시일반으로 투자금을 모으는 행위.
ABS 수지 (ABS resin) 아크릴니트릴(A), 푸타젠(B), 스틸렌(S)이 조합된 플라스틱 수지.
[MADE IN 3D PRINTER] 3D 프린터의 손재주
3D 프린터는 이미 총 이외에도 놀라운 것들을 많이 만들어내고 있다.
1. 의류
디자이너 지리 에벤휘스와 잔느 키타넨은 재활용 플라스틱을 원료로 3D 프린터를 이용해 이 옷을 만들었다. 기존 방식에 비해 원단 제작 속도가 훨씬 빨랐다는 후문이다.
2. 건물
이탈리아 발명가 엔리코 디니는 건축물 인쇄가 가능한 대형 3D 프린터를 개발했다. 현재 유럽우주기구(ESA)가 이 프린터를 이용해 달기지를 건설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3. 임플란트
환자를 CT 스캐너로 촬영한 뒤 그 데이터로 설계도를 만들면 3D 프린터를 이용해 의수족 등 맞춤형 의료기기 제작이 가능하다. 현재 이식용 턱뼈가 개발돼 있다.
5. 미라
고대 미라는 귀중한 고고학 자료로 훼손의 우려가 높다. 그래서 이집트 연구팀은 투탕카멘 미라를 CT 스캔한 후 3D 프린터로 복제품을 제작, 전시회에 대신 내보내고 있다.
6. 인체 조직
미국 샌디에이고 소재 재생의학기업 오거노보는 인간의 세포를 원료로 인체에 이식 가능한 조직을 프린팅하는 3D 바이오프린터 ‘노보젠 MMX’를 판매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