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시티그룹의 신임 은행가 CEO를 상상해보라

[미국 500대 기업] CITIGROUP’S NEW CEO IS A BANKER. IMAGINE THAT.

마이클 코뱃 Michael Corbat은 채 10년도 안돼 거대 금융업체 시티그룹의 CEO 자리에 오른 네 번째 인물이다. 그는 전임자들처럼 탁월한 자금 관리자나 야심만만한 변호사, 허세만 부리는 해결사가 아니다. 대신 그는 지난 30년간 은행업에 종사했다. 시티는 그의 바로 그런 경험을 필요로 하는 걸까?
By Jennifer Reingold, with Doris Burke

2012년 시티그룹 프로파일
수 익: 910억 달러
이 익: 80억 달러
직 원: 25만 9,000명
12개월 주주 수익률: 51%


지난해 12월, 시티그룹의 신임 CEO 마이클 코뱃은 맨해튼에서 열린 시티그룹 전직 임직원 모임에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코뱃이 은행 수장에 오른 후 그를 처음 만났다. 전임자 비크람 팬디트 Vikram Pandit의 갑작스러운 퇴진과 최근 5년간 회사의 참담한 상황 때문에 모임 분위기는 침울했다. 코뱃은 마이크 앞으로 나가 그가 달고 있는, 옛날 시티 로고가 새겨진 푸른색 커프스 단추를 보여줬다. 46년 동안 시티에서 일한 전 직원 한 명이 최근 사망했는데, 직장이 너무나 자랑스러워 생전에 이 단추를 주문 제작했다고 한다. 남편이 한때 느꼈던 것과 같은 자부심을 코뱃이 되찾아주기를 바라며 미망인이 그 유품을 보내 온 것이다. 코뱃은 청중을 한 번 둘러본 후 “자부심이야말로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그 자리에 참석했던 시티의 기관 및 자본시장 담당 전 CFO 한스 모리스 Hans Morris는 “순간 사람들의 숨이 멈추는 것을 들었다”고 전했다. “코뱃은 그 방에 모인 사람들을 모두 자기 편으로 만들었다.”

천천히 그리고 조용하게, 마이클 코뱃은 그 방의 전 직원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취임한 지 7개월째인 코뱃(53)은 퇴색한 명성을 회복하려는 회사에 적합한 리더로 떠오르고 있다. 그는 화려하거나 드러나게 야심만만하지는 않다. 즉흥적이기보다는 사려 깊은 편이다. 그리고 혁명보다는 점진적 변화를 추구하는 성격이다. 이는 우리가 앞으로 살펴볼 시티의 전략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포춘과 어렵게 가진 인터뷰에서 “나는 무언가에 온 몸을 던지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지난 10년간 잇따라 극적인 사건에 휘청거린 이 은행에게 코뱃의 취임은 전통적인 경영 경험이 중요한 가치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반가운 신호다.결국 코뱃의 전임자 세 명(비크람 팬디트, 척 프린스 Chuck Prince, 샌디 웨일 Sandy Weill)은 각각 사람 관리보다는 자금 관리에 뛰어난 헤지펀드의 달인, 명석하지만 과거에 집착하는 기업 변호사, 그리고 전설적인 거대 기업제국을 만든 연쇄 인수합병 전문가였다. 오랫동안 시티를 지켜봐 온 경영 컨설턴트 램 차란 Ram Charan은 “진정으로 전문적인 리더가 시티를 이끌게 된 것은 월터 리스턴 Walter Wriston 이후 28년 만에 처음이다”라고 평했다.

코뱃이 지난해 10월 취임한 후 시티의 주가는 28% 급등하며 KBW 은행지수의 12% 상승을 크게 앞질렀다. 시티 측의 4월 15일 발표에 따르면, 수익은 38억 달러, 수입은 6%로 증가했다. ‘악성’ 자산이 지속적으로 축소되고, 생산성에 더 초점을 맞춘 것도 희망적인 부분이었다. 코뱃은 이를 ‘측정의 문화(a culture of measurement)’라고 부른다. 언뜻 은행에서 쓰기에는 이상한 말처럼 느껴진다. 과거 시티에는 이런 문화가 없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시티에 따르면, 모든 업무기능과 지역에 걸쳐 ‘득점표(scorecards)’를 일관되게 적용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공평하게 말하자면, 생존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어야 할 땐 이런 측정 지표에 투자할 시간이 더 적을 수밖에 없다. 몇 년 전만 해도 1812년 설립된 이 은행은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시티는 당시 하나도 아닌 두 건의, 총 450억 달러에 이르는 자산 구제 프로그램(TARP·Troubled AsRelief Program) 긴급 구제 자금을 받았다(그리고 이후 모두 상환했다). 주가는 2006년 최고가에 비해 98.2% 폭락했다.

안정적이고 건전한 수익을 회복하는 것은 실로 반가운 소식이다. 코뱃의 측정된 접근법(measured approach)도 회의를 품었던 사람들의 마음을 돌리고 있다(그러나 일각에선 은행을 쪼개는 더 급진적인 방식을 선호하기도 한다). 크레디 아그리꼴 증권 Credit Agricole Securities의 애널리스트로, 오랫동안 시티를 관찰해 온 마이크 메이오 Mike Mayo는 “나는 15년 전 시티그룹이 현재의 형태를 갖춘 이후 그 어느 때보다도 지금, 시티그룹 회장과 CEO에 고무되어 있다”고 평했다. 그의 말에는 코뱃이 지금의 자리에 오르도록 도운 마이클 오닐 Michael O’Neill(뱅크 오브 하와이 Bank of Hawaii의 CEO를 역임한 후 지난해 회장에 선임됐다)까지 포함된 것이다.

코뱃은-감히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조금 따분한 인물이다. 그러나 지금 시티는 따분함이 필요하다. 자신의 이름을 딴 회사를 운영하는 애널리스트 메러디스 휘트니 Meredith Whitney는 “나는 록스타 같은 CEO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한 바 있다. “대신 실천력이 있는 CEO를 원한다.”


마이클 루이스 코뱃은 Michael Louis Corbat은 전형적인 은행 CEO에 어울려 보인다. 큰 키에 탄탄한 몸매, 모범생 같은 준수한 외모에 고급 양복을 입고, 과거 이른바 ‘동부 주류파(Eastern Establishment)’를 떠올리게 하는 뉴잉글랜드 억양을 쓴다. 그러나 고향 코네티컷 주 셸턴 Shelton에선 누구도 그가 장래에 세계적 은행의 리더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GE에서 근무한 아버지와 여행사를 운영하던 어머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코뱃은 하키 실력이 뛰어났고, 셸턴 고등학교 미식축구 팀의 공격수로 태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공부에 무관심한 학생이었다. 그러다가 만난 한 하버드 졸업생이 하버드에 진학하면 운동을 하면서 동시에 성공적인 커리어를 준비할 수 있다고 그를 설득했다. 코뱃의 형 톰은 “어느 날 (동생이) 돌변하더니 내가 아는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다”고 회고했다.

그런 노력에도 코뱃은 하버드 대학에 합격하지 못했다. 그래서 고등학교 졸업 후 초트 로즈마리 홀 Choate Rosemary Hall 기숙학교에서 두 번째 도전을 준비했다. 미식축구 팀의 동료 선수였던 루 바사메스 Lou Varsames는 코뱃과의 첫 만남을 절대 잊지 못한다고 말했다. “모든 연습의 막바지에 운동장 네다섯 바퀴를 뛰어야 했다. 코뱃은 늘 모두를 적어도 반 바퀴 차이로 따돌렸다. 그전까지 라인맨은 물론이고, 같은 팀 누구도 나를 이긴 적이 없었다. 코뱃은 그만큼 뛰어났다.”

코뱃은 두 번째 도전 끝에 하버드에 합격했고, 학교의 미식축구 스타가 됐다. 1982년 하버드 학부 일간지 하버드 크림슨 Harvard Crimson은 기사에서 그를 ‘6피트 3인치(190cm), 230파운드(약 113kg) 체격의 상냥한 인물’이라고 묘사하면서, 그가 홀의 식당에서 일하는 노인 직원들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자신의 성공을 팀 동료들 덕으로 돌렸다고 썼다. 코뱃은 직접 사업을 시작해 학생들을 고용하고, 학교 미식축구 경기장과 스케이트장을 청소하기도 했다. 전미 대표로 지명되고, 얼마 못 가 폐지된 미국 미식축구 리그(USFL·United States Football League) 선수로도 뽑혔지만, 결국 프로 선수가 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는 “미식축구는 내 미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1983년 당시 아이비리거 대다수가 그랬듯이, 코뱃도 그의 미래가 월가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 후 ‘잘나가는’ 회사였던 살로몬 브라더스 Salomon Brothers에 입사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살로몬에서 가장 명석한 인재는 아니었지만, 근면함과 호감 가는 성격으로 동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애틀랜타에서 모기지 판매사원으로 시작해 파생상품, 하이일드 펀드, 그리고 신흥시장 부문을 거치며 승진을 거듭했다. 코뱃은 믿을 수 있고 준비된 매니저였으며, 자신이 말을 하는 만큼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인물이었다. 다시 말하면, ‘알파 메일 alpha male’들로 유명한 회사에서 그 정반대의 유형이었다. 살로몬의 시끌벅적한 분위기에서 그는 ‘상원의원’이라는 별명으로 알려졌다. 몇 년 동안 코뱃의 상사였던 패트릭 던래비 Patrick Dunlavy는 “그는 회사 내부의 인간관계가 커리어에 얼마나 중요한지,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더 잘 이해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코뱃은 1993년 매니징 디렉터로 승진해 살로몬의 확정금리부 상품 판매(fixed-income sales)를 총괄하게 되었다. 그는 회사의 다양한 분야에서 새로운 일들을 기꺼이 맡았고, 직원들의 성과와 사기를 개선시킨다는 평가를 받았다. 1998년 살로몬이 처음엔 트래블러스 Travelers, 다음엔 시티로 잇달아 합병되면서, 코뱃은 시티의 신흥시장 판매와 확정금리부 상품개발 책임자로 자리를 옮겼다. 전직 임원 모리스에 따르면, 수차례의 인수 합병 때문에 ‘시티 내부에 문화적 분열이 커졌지만’ 코뱃은 다양한 계파 사이의 간극을 잘 메웠다. 모리스는 “그에게 보고하는 것을 싫어하는 직원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코뱃은 승진을 거듭해 2004년에는 글로벌 관계형 금융 부문을 맡게 됐고, 2007년에는 글로벌 기업금융을, 이후에는 상업은행 부문까지 책임지게 됐다. 팬디트는 2008년 9월 그에게 샐리 크로첵 Sallie Krawcheck이 이끌던 글로벌 재무관리 부서를 맡겼다. 여기에는 스미스 바니 Smith Barney가 포함되어 있었다(크로첵마저도 코뱃을 “합리적이고 사려 깊으며, 성숙하고 원만하며, 존경 받는 사람”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2009년 시티가 재무관리 업무를 모건 스탠리가 관리하는 합작 투자 회사로 이관하면서, 코뱃의 자리는 없어졌다. 그는 한직을 찾는 대신, 야망 있는 출세 제일주의자라면 기피했을 법한 일을 받아들였다. 바로 6,500억 달러 상당의 악성 부채담보부증권(CDO·Collateralized Debt Obligation) 상품들과 기타 자산(위기로부터 회사를 보호하기 위해 시티 홀딩스 City Holdings라는 이름의 새로운 별도 기업으로 이관됐다)을 처분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그때까지의 커리어에서 가장 큰 위험을 감수한 결정이었다. 인간관계를 중시하고 컨트리 클럽 억양을 쓰던 인물이 갑자기 보호 장구를 착용하고 (영화 ‘허트 로커 The Hurt Locker’의 주인공 제러미 레너 Jeremy Renner를 상상하면 된다) 금융 폭탄을 해체하는 것이었다. 한발만 삐끗해도 코뱃의 커리어뿐만 아니라 시티 기업 전체, 더 나아가 세계 금융 시스템이 위기에 처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사회마저 의심을 품어 그에게 ‘임시’라는 꼬리표를 붙였다. 코뱃과 결혼한 지 28년 된 아내 도나는 “정말 자랑스러워요. 당신 이름이 CNBC에 나온 것을 봤어요! 그런데 한 가지 물어볼게요. 아무도 그 일을 원치 않았다면, 당신이 왜 ‘임시직’인 거죠?”라며 그를 놀렸다고 한다. 두 달 후 코뱃은 ‘영구직’에 임명됐고, 지금은 그가 가장 좋아했던 일이 되었다. “회사에 중요한 일이었다. 내가 잘 알거나 접해 본 적 있었던 여러 분야들을 아울렀다. 전 세계적인 규모의 일이었다. 그리고 유일무이한 일이었다. 그전까지 이런 일을 실제로 시도한 적이 없었다.”


팬디트는 시티를 존속시키는 영웅적 과업을 이뤄냈고, 2012년에 이르러선 회사가 최악의 금융위기를 헤쳐 나온 상황이었다. 그러나 시티에서는 새로운 문제들이 태동하기 시작했고, 그중 상당수가 CEO 팬디트와 직접 연관이 되었다. 몇몇 전직 경영진에 따르면, 그는 위기 이후 거의 전면 교체된 시티 이사회와 관계가 돈독하지 않았다.

팬디트의 가장 강력한 우군 중 한 명이었던 딕 파슨스 Dick Parsons 회장이 은퇴를 발표한 2012년 3월 무렵, 팬디트는 난처한 실수를 몇 가지 저질렀다. 시티는 스트레스 테스트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어느 정도는 팬디트와 연방 규제당국의 소통이 부족한 탓이었다. 그리고 7월에는 회사가 스미스 바니의 일부 매각으로 인해 예상치 못한 비용이 발생할 것이라고 발표했는데, 그 액수가 47억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드러났다. 팬디트의 경영 스타일도 문제였다. 전 경영진 여럿도 그를 냉담한 스타일이라고 평가했다. IQ는 더할 나위 없이 뛰어나지만 EQ,(감성지수)는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10월이 되자 오닐 회장과 이사회는 팬디트를 내보내고 코뱃을 그 자리를 앉히기로 결정했다. 코뱃은 오닐이 시티 홀딩스를 전담한 소위원회에서 일할 때부터 가까워졌다. 10월 15일 팬디트가 일상적인 정기회의라고 생각한 모임에 참석했을 때, 그는 이사회로부터 임기가 끝났다는 통보를 받았다.

경영권 승계에 대해 질문하자, 코뱃은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팬디트와 아직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지 묻자 그는 잠시 침묵했다. 한숨을 크게 쉬고는 마침내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고 답했다. 팬디트가 떠난 후 둘이 대화를 나눈 적은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코뱃은 규제 당국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불확실성이 높은 시기에 중요한 장점이다. 연방예금보험공사(FDIC·Federal Deposit Insurance Corporation)의 책임자를 지낸 (현재 포춘 칼럼니스트) 실라 베어 Sheila Bair는 코뱃이 시티 홀딩스를 맡고 있을 때 그를 만났다. “그는 매우 부지런했고, 언제나 꼼꼼하게 준비한 프레젠테이션을 선보였다. 그가 확실하고 정직한 정보를 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는 회의를 8~10 차례 정도밖에 하지 않았지만, 그 만남들은 솔직히 매우 신선했다. 시티의 모든 경영진이 그처럼 기꺼이 사실을 밝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코뱃과 오닐 회장의 돈독한 관계 때문에 CEO가 그저 명목상 수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추측도 커졌다. 코뱃은 오닐이 의사결정권자라는 소문을 웃어넘겼다. 그는 “오닐 회장은 내가 취임한 후 첫 약 90일 가운데 60일에서 70일을 하와이에서 보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하와이에서 경영을 하는 것이 어떠냐고, 실제로 본사를 그곳으로 옮길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묻곤 했다.” 지난 4월 시티의 연례 회의에서 오닐은 코뱃에 대해 “그가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내게 브리핑해 주지만, 나는 누가 이 은행을 경영하는지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나는 경영에 참견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관심을 가질 뿐이다”라고 밝혔다.

현재까지 코뱃은 디지털화, 도시화, 그리고 글로벌화라는 세 가지 흐름을 이용하려 했던 팬디트 계획의 축소판을 전략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팬디트가“위기 동안 잃어버린 시장 점유율을 되찾기 위해 지출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던 부분에 대해선 “시티가 더 이상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주려고 할 수는 없다”며 반대한다. 시티는 실제로 일부 부문에서 완전히 발을 빼고 있다.


코뱃의 뉴욕 파크 애비뉴 사무실에서 전해지는 긍정적인 신호들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다 효율적인 실천이 시티를 다시 번영으로 되돌리는 데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일각에서는-시티를 거대한 ‘종합 금융회사(financial supermarket)’로 만드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인물이자 자칭 코뱃 지지자인 샌디 웨일을 포함한다-시티가 이제는 경영하기에 덩치가 너무 크다고 믿고 있다. 웨일은 포춘과의 인터뷰에서 “어떤 회사가 어느 정도 리스크를 감수할 능력마저 사전에 차단하는 규제 체계를 갖추려면, 사업에서 리스크 부문을 아예 제거해야 한다. 그것은 독립적인 부문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티는 글로벌 사업부들의 집합이다. 이 중 지배적인 우위를 점한 분야는 몇 개 없으며, 규모가 크기 때문에 더 효율적이라는 증거도 별로 없다. 현재 금융 자문가들에게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다이내스티 파이낸셜 파트너스 Dynasty Financial Partners의 신임 회장인 톰슨은 “시티는 한때 세계에서 가장 수익성이 좋고 가장 중요한 금융 서비스 기관이었다. 하지만 이미 오래 전 이야기다. 시티의 수익성과 전략적 중요성 두 가지를 모두 회복하는 것이 마이클의 과제다.”

시티는 자산규모가 1조 9,000억 달러로, J.P. 모건 체이스와 뱅크 오브 아메리카에 이어 세 번째로 큰 미국 은행이다. 양안 지역 외에서는 존재감이 약하고, 현재처럼 인수보다는 자본 확대를 강조하는 규제 환경에서는 더 이상 확장할 희망도 거의 없다. 물론 아시아와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여전히 최고 수준의, 매우 수익성 높은 브랜드지만 유럽에서는 경기침체 때문에 타격을 입었다. 투자은행 업무는 전성기에 비하면 초라한 수준이고, 자산관리 사업은 프라이빗 뱅킹만 남아 있다. 글로벌 거래 서비스 사업(전 세계적으로 돈을 움직이는, 일상적이지만 수익성이 높은 부문이다)은 여전히 강점을 갖는 분야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세계를 선도하는 금융 서비스 회사의 기반을 삼는 것이 충분할까?

코뱃은 그렇다고 주장한다. 그는 시티가 100여 개 국가에 진출한 것은 ‘독특한’ 특징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기관과 고객 모두에게 중요한 것은 세계 상위 150개 도시이며, 시티는 그중 130곳에 진출해 있다고 말했다. 코뱃은 “우리가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하는 고객층은 대중 부유층(mass affluent), 이동성이 높은 고객층(the mobile)이다. 뉴욕의 파크 애비뉴, 런던의 스트랜드가 그 어느 곳에도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시티뱅크가 있음을 알기에 편의를 누리려는 고객이다”라고 설명했다. “우리는 시골에서 경쟁하지 않을 것이다.”

코뱃은 시티를 쪼갤 것이라는 소문을 일축했다. 그는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 모델이 더욱 독특하고, 가치 있는 것이 됐음을 보여줄 능력을 얻었다”고 강조했다.

지금으로선 시티가 안정에 가까워졌음을 보는 것만으로도 투자자들은 기쁠 수 있다. 그러나 시티는 곧 다시 성장해야 한다. 이렇게 경제가 부진한 상황에서 상당한 공적이 될 것이다. 코뱃은 어떻게 이 과업을 이룰지 아직 밝히지 않았다.

분명한 점은, 지난 수년 동안 실망스러운 자산을 처분한 경험이 있는 코뱃에게 몸집 불리기는 고려대상이 아닐 것이라는 사실이다. 모리스는 코뱃이 대학 졸업 후 미식축구 선수 몸집의 몸무게를 어떻게 줄였는지 전했다. 언제나처럼 자기 관리가 철저했던 코뱃은 보스턴 마라톤을 준비하며 (그리고 완주하며) 50파운드를 감량했다. “그는 ‘나이가 들면 세 가지 중 하나에 속하게 된다. 계속 운동을 해서 근육량을 늘리든지, 살이 찌든지, 몸무게를 줄이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몸무게를 줄였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선택은 시티가 갈 수 없는 길이다. 이제 코뱃이 해야 할 일은 시티에서 50파운드에 해당하는 ‘군살’을 빼는 것이다. 그에게 별로 힘든 일일 것 같지는 않다.


“진정으로 전문적인 리더가 시티를 이끌게 된 것은 월터 리스턴 Walter Wriston 이후 28년 만에 처음이다.” _램 차란

“우리가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하는 고객층은 대중 부유층이다. 우리는 시골에서 경쟁하지 않을 것이다.”_마이클 코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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