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천재 워치메이커 파르미지아니가 만든 감성적·철학적 분위기 독특한 브랜드

시계 브랜드 이야기 ⑪ 파르미지아니

미셸 파르미지아니는 현존하는 최고의 시계 복원가이자 워치메이커다. 쿼츠 파동으로 기계식시계 업계가 최악의 상황을 맞이했던 1970년대, 그는 시계 관련 회사 PMAT를 설립하는 정반대의 행보로 주목을 받았다. 미셸 파르미지아니는 1997년 그 자신만큼이나 독특한 브랜드 정체성을 가진 하이엔드 워치 브랜드 파르미지아니를 새롭게 론칭시켰다. 파르미지아니는 미셸 파르미지아니 그 자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창립자를 쏙 빼닮은 브랜드다.
김강현 기자 seta1857@hmgp.co.kr

어떤 일에 자기 삶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 이들이 있다. 세상은 이들을 장인(匠人) 혹은 프로라고 부른다. 모든 걸 다 쏟아부어도 결과가 만족스럽다는 보장은 없다. 걸음마 때부터 공을 찬 수많은 축구 꿈나무들이 있지만 빅리그에 진출하는 이는 많지 않은 것과 같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메시나 호날두처럼 세계인의 주목을 받는 선수로 성장하기는 더욱 어렵다. 이들은 흔히 ‘천재’라고 불린다. 노력 너머의 재능을 타고났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보통 천재라 불리는 이들을 우상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노력으로는 넘을 수 없는 재능이 경외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이들은 어느 분야에서나 존재하고 또 빛이 난다.

시계산업 분야에도 천재들이 있었다. ‘현대 기계식시계의 원리 대부분을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 시계 분야 올 타임 No.1 천재 아브라함 루이 브레게 Abraham-Louis Breguet를 비롯해 세계 최초로 탈진기에 헤어스프링을 사용한 크리스티안 호이헨스 Christiaan Huygens 등이 그들이다. 물리학자이자 천문학자이기도 했던 크리스티안 호이헨스는 역학의 기초를 세우는 데에도 큰 공헌을 했다.

현재 생존해 있는 워치메이커 중에서도 천재라는 칭호를 받는 이가 있다. 파르미지아니 브랜드의 창시자 미셸 파르미지아니 Michel Parmigiani다. 미셸 파르미지아니는 ‘신의 손’으로 잘 알려진 세계 최고의 시계 복원가이다. 아무리 오래되고 훼손이 심한 시계일지라도 그의 손을 거치면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그가 수락한 시계 복원 작업은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다.

미셸 파르미지아니는 이탈리아계 스위스인으로 1950년 12월 2일 스위스 뇌샤텔 Neuchatel 지방 발-드-트라베르 Val-de-Travers 지구에 위치한 코우벳 Couvet에서 기계 장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코우벳은 수려한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작고 조용한 외딴 마을로 이러한 환경적 조건은 미셸 파르미지아니가 예술적 영감을 키우는 데 큰 자양분이 됐다.

그가 태어난 뇌샤텔 지방은 17세기부터 시계 산업의 메카로 꼽히는 곳이었다. 19세기 철학자 칼 하인리히 마르크스 Karl Heinrich Marx는 그의 저서 ‘자본론 Das Kapital’에서 뇌샤텔 지방의 라쇼드퐁 La Chaux-de-Fonds 지역을 두고 ‘거대한 시계 공장’이라고 표현했을 정도다. 뇌샤텔 지방의 라쇼드퐁과 르로클 Le Locle 두 지역은 2009년 유네스코로부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이 같은 지역 분위기 때문에 미셸 파르미지아니는 어렸을 때부터 시계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18세기의 위대한 크로노미터 워치메이커 페르디낭 베르투 Ferdinand Berthoud를 비롯해 이전 시대의 전설적인 워치메이커들에 대해 특히 많은 관심을 보였다.

미셸 파르미지아니는 시계 제조나 복원에 대한 기술적인 역량 외에 이론적 깊이도 상당했다. 고향 마을에서 멀지 않은 플러리에 Fleurier(역시 뉘샤텔 지역에 있다)에서 시계학교를 졸업한 그는 라쇼드퐁의 테크니콤 Technicum 고등 시계기술학교에 진학했으며, 이후 르로클에 있는 테크니콤 마이크로 기계공학과에서 최종 수학했다.

그는 학창시절 매우 인상 깊은 학생이었다. 그는 보통의 워치메이커들과는 달리 다방면에 깊은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음악, 미술, 철학, 천문, 과학 등에 대한 다방면의 관심은 그의 견문을 크게 넓혀 주었고, 이후 파르미지아니 브랜드가 갖게 된 독특한 브랜드 정체성의 바탕이 됐다.

시계 장인으로서의 천부적인 재능과 다방면의 깊은 지식은 학교에서도 특출났고, 이는 미셸 파르미지아니가 학생 신분임에도 지역의 유명 워치메이커들과 함께 시계 복원사업에 뛰어든 계기가 됐다. 그는 이 과정에서 시계 외에 다른 유물 복원작업도 병행하게 됐는데, 이때의 경험은 다방면에 대한 그의 지식을 더욱 살찌게 했고 이는 다시 복원가로서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밑거름이 됐다. 일종의 선순환이 된 셈이다.

미셸 파르미지아니가 르로클 테크니콤을 졸업한 1974년은 워치메이커들에게 최악의 시기였다. 1969년 세이코가 상업화에 성공한 쿼츠시계는 순식간에 전 세계를 뒤덮었다. 건전지를 이용해 동력을 얻는 쿼츠시계는 기계식시계에 비해 시간 오차도 적었고 제작 공정도 훨씬 간단했다. 쿼츠시계는 세계 어디든 공장만 지어 놓으면 순식간에 산더미처럼 찍혀 나왔다.

특히 1970년대 중반은 쿼츠파동이 최절정기로 치닫고 있던 때였다. 당시 무려 5만여 명에 이르는 워치메이커들이 실업자로 전락했다. 워치메이커들은 금속 세공사로 전향하는 등 새로운 직업 찾기에 골몰했다. 하지만 이때 미셸 파르미지아니는 정반대의 길을 선택한다. PMAT라는 시계 관련 회사를 창립한 것이다. PMAT는 Parmigiani Mesure et Art du Temps의 약자로 ‘시간예술로의 여행’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철학적이고 예술가적인 미셸 파르미지아니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이름이다.

원래 목적은 시계 복원이나 제작에 맞춰져 있었지만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PMAT는 온갖 일을 다 맡았다. 그중에서도 주로 역사적 가치가 있는 물건을 복원하는 일이 많았다. 당시 겨우 20대 중반의 나이에 불과한 미셸 파르미지아니였지만 복원가로서는 이미 최고의 장인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복원하는 물건의 종류는 다양했다.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 같은 고급 악기는 물론 천체 모형기기 등을 의뢰받기도 했다. 의뢰인들은 주로 박물관이나 기업, 대부호 등이었다. 글로벌 제약사로 유명한 산도즈 Sandoz 재단도 그중 하나였다. 산도즈 재단은 제약업 외에도 부동산, 레저, 호텔 등 다양한 사업을 영위하는 종합 그룹사이다.

PMAT를 운영하는 동안 미셸 파르미지아니는 재생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여러 물건들을 복원해내 큰 이슈가 되곤 했다. 그중에서도 1820년에 제작된 브레게의 심퍼티크 Sympathique 시계 복원은 미셸 파르미지아니가 ‘신의 손’이란 별칭을 얻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후 산도즈 재단은 미셸 파르미지아니의 기술력을 완전히 신뢰하기에 이르렀고 고객사이자 후원사로 PMAT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기에 이른다.

미셸 파르미지아니와 신뢰를 쌓아가던 산도즈 재단은 급기야 1996년 PMAT의 최대주주가 된다. 이후 산도즈 재단은 미셸 파르미지아니가 시계 제작과 복원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여러 배려를 해주는데 이는 1997년 PMAT가 파르미지아니 브랜드로 새 출발하는 계기가 됐다.

산도즈 재단이 미셸 파르미지아니한테 제공한 배려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회사 경영지원이었고, 두 번째는 미셸 파르미지아니가 만족할 만큼 파르미지아니 매뉴팩처가 기능할 수 있도록 제반 여건을 조성해주는 일이었다. 미셸 파르미지아니는 PMAT를 창립하긴 했지만 경영에 취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시계 제작과 복원이 좋아 자신이 직접 회사를 세웠을 뿐이다. 쿼츠 파동기에는 새로 워치메이커를 고용하는 시계회사가 없었기 때문에 시계 관련 일을 하려면 자신이 직접 회사를 세우는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회사 경영은 그에게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안겨줬다. 산도즈 재단은 파르미지아니 브랜드에 전문 경영인 체제를 도입함으로써 미셸 파르미지아니의 부담을 덜어줬다. 현재 파르미지아니는 2000년에 선임된 장 마르크 자코 Jean Marc Jacot CEO가 15년째 경영 부문 수장을 맡고 있다. 산도즈 재단은 또 ‘100% 인하우스 매뉴팩처 라인을 만들자’는 미셸 파르미지아니의 제안을 받아들여 2000년부터 10여 년간이나 부품사 인수 및 작업장 개선 작업에 박차를 가한다. 이 작업이 10여 년이나 계속된 데에는 완벽한 시계를 만들겠다는 미셸 파르미지아니의 기술적 욕심이 작용했다. 파르미지아니 산하 부품사들은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시계 브랜드들도 파르미지아니의 부품사들로부터 각종 부품을 제공 받을 정도다.

회사 경영과 각종 복원사업으로 시간을 뺏기던 미셸 파르미지아니가 시계에만 오롯이 집중할 수 있게 되면서 파르미지아니 매뉴팩처의 시계들은 양적·질적으로 큰 발전을 한다. 100% 인하우스 매뉴팩처 라인이 완성된 2003년 이후 파르미지아니는 무브먼트가 세로로 배열된 부가티 시리즈를 내놓는 등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제품을 론칭시켜 주목을 받는다. 파르미지아니 시계는 다소 감성적이고 철학적인 브랜드로 창립자인 미셸 파르미지아니를 쏙 빼닮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 파르미지아니는 1997년 론칭 이후 올해까지 27년 동안 18개의 인하우스 무브먼트를 내놓아 업계의 주목을 받았다.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유명 시계 브랜드 중에서도 18개 이상의 자사 무브먼트를 가진 곳은 손에 꼽을 정도다. 시계 생산 규모도 커졌다. PMAT 때는 연 500점 생산에 불과했으나, 파르미지아니로 브랜드명이 바뀌고 나서는 연간 생산량이 5,000~6,000점으로 10배 가까이 늘었다. 이 같은 생산량 증가가 여타 브랜드들처럼 시계 제작에 자동화 공정을 도입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작업장 환경을 개선하고 규모를 늘린 결과다. 파르미지아니는 아직도 거의 모든 생산 공정을 오직 수작업으로만 하는 브랜드로 유명하다. 파르미지아니 시계 한 점이 완성되는데 최소 400여 시간 이상이 걸리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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