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조 말론, 그 달콤한 성공의 향기

[VENTURE] How I Got Stared<br>The Sweet Smell of Jo Malone’s Success

어려움 속에서도 세계적인 목욕 및 미용용품 기업을 일궈낸 그녀의 놀라운 여정
By Dinah Eng


조 말론 Jo Malone의 어린 시절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다. 난독증을 앓았고 가정사도 순탄치 않았으며 14세에 학업을 중단했다. 하지만 말론(50)은 야망이 있었고, 자신만의 재능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향을 구분하고 조합하는 능력이 매우 정확하고 예술적이었다. 말론은 자신의 부엌에서 시작해 와일드 피그 앤드 카씨스 코롱 Wild Fig & Cassis Cologne에서부터 너트맥 앤드 진저 배스 오일 Nutmeg & Ginger Bath Oil까지 이국적인 향수에서 피부 및 목욕용품에 이르는 제품을 만들어냈다. 말론은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로 수백만 달러 규모의 전 세계적 성공을 이뤄냈고, 이를 미용업계 거대기업 에스티 로더 Estee Lauder에 매각했다(에스티 로더는 개별 브랜드별 결과를 공개하지 않는다). 유방암 투병을 마친 말론은 조 러브스 Jo Loves라는 새로운 브랜드로 돌아왔다.

나는 미국인들이라면 저소득 지역이라고 부를만한 영국 켄트 Kent 지역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건축가였으며 어머니는 당시 피부관리 전문업체였던 레브론 Revlon에서 일했다. 아버지는 도박을 좋아했고, 아버지가 없을 때 내가 집안일을 돌보곤 했다. 매우 힘겨운 어린 시절이었다.

내가 14세가 되던 해에 어머니는 신경 쇠약에 시달렸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돌보지 않았고, 동생은 겨우 아홉살이었다. 어머니를 돌보면서 동생도 키우기 위해 학교를 그만뒀다. 몇 년이 지나 어머니의 상태가 호전되면서 나는 16세에 런던으로 거처를 옮겼다. 가족과 다름없는 훌륭한 친구들과 함께 살았다. 어머니의 상태가 다시 나빠지기 전까지 그곳의 작은 꽃가게에서 일했다. 때로는 자신이 원하는 길을 편하게 선택할 수 없기 마련이다. 남편 게리 Gary를 만나고 나서야 나 자신과 남편에 대해 생각할 때라고 느꼈다. 나는 21세에 결혼했고 어머니의 상태는 많이 안정됐다. 미용 관련 서적의 도움을 받아 어머니가 만들던 미용 크림 제조법을 익혔다. 화장품을 만들기 시작했고, 내게 큰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내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바로 난독증이었다. 난독증 덕분에 오히려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색깔에서 향기를 맡을 수 있다. 사물을 향기로 표현할 수도 있다. 60개에서 80개에 이르는 향을 테스트하면서 언제 향이 완성됐는지 알 수 있다. 여성 고객이 내 화장품을 구입하러 오면, 감사의 표시로 너트맥 앤드진저 배스 오일을 작은 병에 담아 선물하곤 했다. 모두가 이 선물을 좋아했다.

1990년께 크리스마스 시즌에 수백 병에 이르는 배스 오일을 만들면서 큰 피로감을 느꼈다. 하루도 쉬지 않고 아침부터 밤까지 화장품을 만들었다. 부동산 감정사로 일하던 남편은 이를 사업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는 “내년에 가게를 열어야겠다”고 말했다.

몇 년 후 남편은 하던 일을 그만두고 적합한 매장을 물색했다. 마음에 드는 곳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첼시 월튼 Chelsea Walton 154번가를 지날 때, ‘이곳이다’라는 마음의 소리가 들렸다. 폐허에 가까운 곳이었지만, 딱 맞는 위치라는 느낌이 들었다. 소매업을 하는 사람에게는 감이 정말 중요하다. 마음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 실수하기 마련이다. 1994년 10월 가게를 열었고, 지금 그 지역에는 스텔라 매카트니 Stella McCartney, 제이 크루 J. Crew, 캐롤리나 에레라 Carolina Herrera 등의 매장이 위치 해 있다. 당시 경기는 침체돼 있었고 우리 사업 규모도 너무 작았기 때문에 매장 오픈이 적절하지 않다는 사람이 많았다. 어려운 점은 있었지만 재정적으로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매장을 열고 한 달이 지난 11월 5일 내 생일에 여러 VIP 손님을 가게로 초대했다. 당시에 집에서 배스 오일을 만들고 있었고, 남편에게 “병을 가득 채우지 말라”고 이야기했다(오일은 열이 가해질 경우 팽창하기 때문에 팽창 후에도 위험하지 않도록 공간을 남겨둬야만 한다). 그런데 남편은 병이 가득 차 있어야만 고객이 만족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저녁, 배스 오일이 선반 조명 아래 있었는데 갑자기 1812년 서곡(1812 Overture)을 연주하는 것 같은 굉음이 들렸다. 모든 제품의 뚜껑이 폭발하듯 열렸고, 보건 및 안전상의 문제로 상점을 닫아야만 했다. 매장 이곳 저곳에 오일이 흥건했다. 나는 헤어 드라이기로 선반을 말리느라고생했고 며칠 동안 남편과 말도 하지 않았다.

너무 오랫동안 혼자서 일하다 보니 남을 믿기가 쉽지 않았다. 브랜드가 곧 내 이름이었기 때문에 제품이 곧 내 자신 같았다. 절대 2등에 만족하지 않았다. 매장을 열자마자 언론으로부터 큰 주목을 받았다. 영국 보그 Vogue, 파이낸셜 타임스 Financial Times가 우리 매장을 보도했다. 사업은 성장세를 지속했다. 오프라 윈프리 쇼에도 출연했고, 그 방송 후에는 엄청난 수의 고객이 매장을 방문했다. 꿈이 이뤄지는 것 같았다.

바로 그 첫 해에 뉴욕 버그도르프 굿맨 Bergdorf Goodman 백화점이 처음으로 매장을 열어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매출 100만 달러는 금세 넘겼다. 니먼 마커스 Neiman Marcus나 삭스 Saks 등과 바로 소매 파트너십을 맺었다. 여러 사업전략 문서를 다 기억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 돈을 쓰는 것보다 버는 속도가 더 빨랐다. 모든 사람의 꿈이 우리에겐 현실이었고, 제품 수요가 있는 곳마다 매장을 열었다.

뉴욕에서 우리 제품에 대한 수요를 형성하기 위해서 모델, 가수 등 지인 50명을 찾아갔다. 한 사람당 10개의 제품을 선물했고 그들에게 집들이 선물로 써달라고 부탁했다. 따로 마케팅팀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첫 뉴욕 매장을 열기 4개월 전, 조 말론 쇼핑백 200개를 친구들에게 나눠주고 거리에 들고 나가 달라고 부탁했다. 그 효과는 강력했다. 사람들이 우리 제품을 보기 수개월 전에 우리 제품의 포장을 본 것이다. 런던과 헤롯 Harrod에 두 번째 매장을 열었고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수많은 사업 제안을 받았다. 투자하거나 프랜차이즈를 운영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모두 거절했다. 사업이 성공가도를 달리면서, 평생 함께 할 수 있는 파트너를 찾기 시작했다. 래너드 로더 Leonard Lauder(당시 에스티 로더 CEO)가 우리 매장을 방문해 함께 점심을 먹었다. 그가 참 마음에 들었다. 훌륭한 소매업자였고 안전하게 사업을 운영할 것임을 알 수 있었다. 1999년 조 말론을 그에게 매각했다.

우리는 계속 매장을 늘렸고,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2003년 아침 어느 날 가슴에 멍울이 잡혔다. 악성 종양 진단을 받았다. 이블린 로더 Evelyn Lauder에게 전화를 하니 “레몬으로 레모네이드를 만든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말라 (If life deals you lemons, make lemonade) *역주: 최악의 상황에서도 최선의 결과를 이뤄내야 한다는 의미”고 말했다. 가슴에 남는 말이었다. 뉴욕에서 1년간의 항암치료 후 수술을 받고 그곳에서 계속 매장을 운영했다.

그 즈음 아들이 네 살이 되었고, 암이 재발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어느 날 매디슨 애비뉴 Madison Avenue에 위치한 매장 앞에 서 있는데, 그저 가족과 함께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기적과 같은 일을 해낼 힘이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2006년 사업에서 손을 뗐다.

매일 같이 일어나자마자 향기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5년 동안 동종 사업을 하지 않겠다고 동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비시 원 BBC One에서 하이 스트리트 드림즈 High Street Dreams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신생기업의 출발을 도와주기로 결정했다. 하루는 정원에서 칠리 소스를 담는 작업을 촬영 중이었는데, 그때 스스로 다시 향기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1년 약속한 5년의 기간이 끝났고, 사업을 시작해도 된다는 변호사들의 확답을 들었다.

내 이름은 여전히 조 말론이다. 그러니 새롭게 시작한 회사는 뭐라고 불러야 했을까? 나와 같은 방식으로 향을 바라보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이 분야에서는 향에 대한 내 사랑이 곧 사업 자체이다. 조 말론은 내가 30년 전 사업을 시작할 당시의 내 자신이고, 우리의 새로운 이름인 조 러브스 Jo Loves는 지금의 내 자신이다.

다시 사업을 시작하면서 처음 사업을 할 때보다 더 많은 실수를 저질렀다. 다시 시작하면서 너무 서둘렀고, 적절치 않은 위치에 팝업 매장을 열었다. 포장이 준비되기도 전에 제품을 내놓았고, 충분한 광고도 하지 않았다. 조 러브스가 누구의 제품인지 모르는 소비자들의 힘을 과소평가했다. 사람들은 내가 조 말론을 떠났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2013년 10월, 내가 꽃가게 점원으로 일했던 런던 엘리자베스 거리 매장 자리에 조 러브 매장을 열었다. 다시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으며 올바른 결정임을 알고 있다. 스스로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인생은 물론 암투병, 소매업에서 성공했다. 내게 주어진 재능에 충실했고, 삶에서 후회하기를 원치 않았다. 위험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 또 다른 미용 사업을 시작하진 않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이다.


나의 조언

조 말론
조 말론과 조 러브스 설립자

돈을 좇지 마라. 때때로 필요하지도 않은 때에 은행 대출을 찾는 경우가 있다. 만들어 낼 제품과 그 제품을 통해 이룰 성과를 생각해보라. 브랜드 가치를 최대한 오랫동안 유지하라.

함께 일하는 매니저들만 만나지 말라. 제품을 판매하는 사람은 물론 고객도 만나보라. 수백만 병의 제품을 파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고객이 두 번, 세 번, 네 번째 다시 제품을 구입하러 오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경쟁업체가 근처에 등장한다고 해서 미워하지 마라. 매출이 좋을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지만 더 큰 그림을 봐야 한다. 서로를 돕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찾아보면 결과적으로 스스로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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