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반까지 한국산 맥주라면 OB(동양맥주)와 조선맥주(현 하이트) 둘뿐이었다. 그러던 중 진로와 미국 쿠어스 맥주의 합작사로 카스 맥주가 등장했다. OB가 1999년 카스를 인수합병 했으니, 그 후 맥주사는 다시 둘로 줄어든 셈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공정거래위원회가 나서야 할 만큼 당시 맥주업계는 과점 상황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수입 맥주가 늘어나면서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독일계나 미국계 맥주도 인기가 있지만 아사히나 삿포로 등 일본계 맥주도 꾸준히 판매량이 늘고 있다.
롯데도 최근 아사히 기술을 도입하여 클라우드라는 브랜드로 맥주 시장에 진출했다. 소비자 입장에서 보면 선택의 폭이 넓어진 셈이다.
아사히와 삿포로에 대해 좀 더 알아보자. 일본 도쿄에 가면 멀리서도 바로 알아볼 수 있는 유명한 건물이 하나 있다. 아사히 본사 건물이다. 이 건물은 지붕이 맥주 거품 모양으로, 본체는 맥주 색을 본떠 황금색으로 디자인 되어 있다. 건물의 이름도 ‘비어홀’이다. 회사를 모르는 사람도 이 빌딩의 모습을 보기만 하면 회사가 어떤 제품을 만드는지 알 수 있다. 건물 주변을 지나는 사람들도 건물을 언뜻 보기만 하면 비어를 생각하게 될 테니 엄청난 효과를 올리고 있는 셈이다. 건물의 이름도 비어홀이니 건물의 주소도 광고가 된다. 1980년대 망하기 직전 아사히 맥주 사장으로 부임하여 회사를 부흥시킨 히구치 히로타로 사장은 일본 최고의 경영자로 지금도 존경 받고 있다. ‘인간존중’과 ‘진실된 마음’이라는 그의 경영철학 스토리는 일본 사람들 대다수가 잘 알고 있다. 이러니 회사의 건물을 보기만 해도 사람들은 아사히 맥주를 떠올리게 되고, 또한 아사히의 경영철학이나 히구치 히로타로 사장까지 생각하게 된다.
삿포로 맥주는 일본의 최북단에 위치한 홋카이도 섬 삿포로시에 위치해 있다. 삿포로 하면 겨울 눈 축제와 공해 없는 파란 하늘이 떠오른다. 삿포로 맥주는 바로 이런 홋카이도의 깨끗한 눈 녹은 물로 만든 맥주라는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삿포로 시내에 위치한 삿포로 맥주의 옛 공장 건물은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해마다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유명한 장소다.
이곳을 방문한 관광객들은 수십 년 동안 맥주 생산에 사용된 낡은 장비들과 공장 건물을 견학하면서 삿포로 맥주의 정신에 대해 듣고 돌아간다. 투어 마지막 코스로 시원한 맥주 한잔을 들이키는 것은 물론이다. 관광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삿포로 맥주의 홍보가 이뤄지는 셈이다. 1890년에 건축되었다는 낡은 빨간색 벽돌 건물은 삿포로를 소개하는 기념엽서에 등장할 정도로 유명하다. 대부분의 일본 사람들은 이 건물의 사진만 보면 삿포로 맥주 건물이라는 것을 알 정도다.
미국에도 이와 비슷한 회사가 있다. 드레스덴이라는 시골 마을에 위치한 롱가버거 Longaberger라는 고급 수제 바구니를 만드는 회사는 놀랍게도 사옥이 거대한 바구니 모양을 하고 있다. 회사의 주제품인 바구니와 사옥의 모양이 거의 똑같다. 그러니 사옥 자체가 살아있는 광고탑인 셈이다. 회사는 지역사회에도 많은 돈을 투자하여 아름다운 전원도시를 가꾸었다. 그래서 회사보다 아름다운 도시의 모습이 더 알려지게 됐다. 이 회사의 생산과정과 사옥, 도시를 견학하러 사람들이 몰려오는 바람에 한때 몰락했던 조그마한 도시가 다시 살아날 정도다. 장애인이었던 창업주의 감동적인 스토리까지 알려지면서, 롱가버거는 더욱 큰 홍보 효과를 누릴 수 있었다.
국내에서도 이제 디자인이 아름다운 건물들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건물의 외관만을 보고 그 회사가 어떤 제품을 만드는 회사인지 알 만큼 재미있게 디자인된 건물은 아직 보지 못했다. 필자가 알고 있는 드문 예외는(기업의 예는 아니지만) 서울대학교 정문이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국립서울대학교’의 첫 글자인 ‘ㄱ’과 ‘ㅅ’, ‘ㄷ’을 조합해서 서울대 정문을 디자인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서울대 정문을 보면 이런 스토리텔링까지 사람들의 마음 속에 떠오른다. 대학 관련 뉴스는 TV에 종종 등장한다. 입시철이 되면 특히 더 그렇다. 뉴스보도 중에도 배경화면으로 서울대학교 정문 모습이 종종 등장한다. 이 모습을 보면 상당수의 우리나라 사람들은 배경이 서울대학교라는 것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TV에 등장한다고 해서 화면에 비치는 모습이 어느 학교인지 알 수 있는 대학은 별로 많지 않다. 그만큼 디자인의 광고효과는 강력한 것이다.
정문 디자인 하나로 다른 학교들은 누릴 수 없는 엄청난 홍보 효과를 서울대는 누리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건물의 외관을 그 건물을 사용하는 기업과 바로 연관시킬 만큼 독특한 건물은 별로 없다. 건물이나 기업과 관련해 사람들이 떠올릴 만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경우도 드물다.
놀이공원과 호텔, 백화점이 결합된 잠실 롯데월드 빌딩은 외관이 워낙 독특해서 이 건물을 보면 어떤 빌딩인지 사람들이 기억할 것이다. 63빌딩의 경우 많은 사람들이 건물을 보면 건물의 이름이 63빌딩이며, 그 이름이 63층이기 때문에 붙여졌다는 스토리를 기억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건물이 한화생명이라는 회사의 본사라는 것까지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여의도에 위치한 LG그룹의 쌍둥이 빌딩도 상대적으로 유명하지만, 그렇다고 쌍둥이 빌딩의 외관만 보고 회사를 알아챌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서울을 홈 구장으로 사용하는 프로야구단의 명칭인 ‘트윈스’가 LG의 쌍둥이 빌딩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것이라는 스토리를 아는 사람도 드물다.
사옥은 아니지만 현대카드는 디자인을 통해 일관된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노력한다. 현대카드의 광고를 보면 수년 동안 필체나 스타일이 똑같이 유지되고 있다. 현대카드가 디자인해서 서울시에 기증한 서울역 앞 버스 승강장 디자인도 현대카드 고유의 터치가 느껴진다. 현대카드의 광고에서 나타나는 선의 모습이 승강장 디자인에서 보이는 선의 모습과 똑같으니 말이다. 이 승강장에는 지저분한 광고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다만 한쪽 벽면에 조그마하게 ‘Designed by Hyundai Card’라고 써 있을 뿐이다. 이런 미묘한 방식으로 현대카드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알리고 있다. 심지어 현대카드는 고객들에게 선물하는 선물 포장이나 초콜릿의 포장지, 회사 내에서 사용하는 서류나 노트 등도 모두 같은 디자인을 사용하고 있다. 이런 목적을 위해 현대카드는 상당히 큰 자체 디자인실을 보유하고 있다. 이런 꾸준한 노력을 통해, 현대카드는 회사 이름을 크게 써 붙이지 않아도 사람들이 디자인만 보고도 현대카드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했다.
이처럼 기업들은 사옥 외관이나 그 뒤에 숨어있는 스토리까지 일관된 메시지를 전달해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비싼 광고료를 지불하지 않고도 국민 누구나 그 회사를 기억할 수 있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모두에게 감동이나 웃음을 줄 수 있는 스토리까지 추가된다면 효과는 더욱 클 것이다.
예컨대 삿포로 박물관 투어처럼 필자는 포항에 위치한 포스코 역사관 투어를 통해 포스코의 설립과 발전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일본과 국교를 재개하면서 받은 강점 피해보상금으로 포스코를 만들었으니, 이는 일제하에서 핍박 받았던 우리 선조들의 피와 땀에 대한 보상금인 셈이다. 이런 돈을 이용해서 제철소를 만들었으니 실패하면 국가와 민족에게 큰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 우향우해서 영일만 앞바다에 몸을 던져야 한다”고 했던 고 박태준(2011년12월 타계한 포스코 초대 CEO) 씨의 말은 이제 역사가 되었다.
해방 이후 역사의 격랑을 헤치며 성장해온 한국의 다른 기업들도 틀림없이 이런 감동적인 스토리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런 스토리를 적극 개발해서 소비자들에게 메시지를 전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소비자나 국민들이 우리 회사를 몰라준다는 이야기는 핑계일 뿐이다. 그리고 단지 회사 건물이나 공장만 보여주는 것으론 소비자나 국민들이 감동을 받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마음을 움직이는 감동적인 스토리가 더해져야 뚜렷하고 진정성 있는 이미지를 구축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