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스타트업 대표들에게 공통 질문을 던졌다. ‘현재 당신의 가장 큰 목표는 무엇인가?’ 당연히 ‘성공’이라는 대답이 나올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그들의 대답은 ‘성공’이 아닌 ‘생존’이었다. 창업가들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장밋빛 미래보단 살아남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생존하다 보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2015년 벤처생태계에서 스타트업이 생존하기 위해선 과연 무엇이 필요할까? 포춘코리아는 이 질문의 해답을 얻기 위해 벤처업계에서 생존의 달콤함을 맛본 전문가 3인과 대담을 진행했다. 벤처캐피털 케이큐브벤처스의 임지훈 대표, 영화큐레이션 서비스 ‘왓챠’를 서비스하는 프로그램스의 박태훈 대표, 한게임(현 NHN엔터테인먼트) 대표 출신 정욱 넵튠 대표가 대담 참가자다.
김병주 기자 bjh1127@hmgp.co.kr
기자: 지난 2014년 기준 국내 스타트업 수는 약 2만 9,000여 개에 달한다. 스타트업 3만 개 시대가 가시화되고 있다. 정부 또한 창조경제 기조 속에서 벤처에 대한 지원책을 쏟아내고 있다. 각자의 사업 영역에서 2014년 스타트업 생태계를 평가해달라.
정욱(이하 정): 게임 업계를 돌아보면 올해의 키워드는 ‘국내 시장의 포화’라고 할 수 있다. 대다수 게임 기업은 ‘안 망하고 살아 있는 것이 다행’이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특히 올해는 대다수 게임 개발사들의 모바일 집중화가 심해진 한 해였다. 게임업계 전체로 봤을 때 결코 긍정적인 분위기는 아니다.
박태훈(이하 박) : 올해는 돈이 될 만한 시장만 커진 한 해였다. 대표적인 분야를 꼽자면 직접 돈이 오고 가는 ‘핀테크(FinTech) 시장’ 정도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왓챠처럼 고객에게 특정 정보와 서비스를 제공하는 ‘서비스 스타트업’에게는 기회의 문이 닫힌 한 해였다. 이 같은 상황은 소비자들의 애플리케이션 구매 패턴과도 연관되어 있다. 우후죽순 격으로 앱이 쏟아지다 보니 크게 화제가 된 서비스가 아니면 금방 스마트폰에서 삭제 돼 버리고 말았다. 시장에 확실히 정착한 기존 스타트업 외에 신생 스타트업의 경우 대부분 어려운 시기를 경험했다.
정: 그래도 왓챠는 괜찮지 않았나? 일본에서 가시적인 성과도 있었고.
박: 2014년 7월에 일본 시장에 iOS 버전의 일본어 서비스를 출시했다. 일본을 출발점으로 글로벌시장 진출을 노리고 있다. 2015년에는 영화에서 벗어나 드라마, 도서 등 다양한 콘텐츠를 서비스 할 예정이다.
임지훈(이하 임): 난 왓챠의 일본시장 성공을 확신한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일본에서 관심이 높은 미디어 콘텐츠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예를 들자면 일본 AV?(웃음)
박: AV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참고해 달라.(웃음)
기자: 국내 많은 스타트업들이 일본시장 공략에 집중하고 있다. 일본 시장에 관심을 갖는 특별한 이유는 무엇인가?
임: 2014년 기준으로 일본 내 스마트폰 보급률이 50%를 넘어섰다. 단순 수치상으론 저조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일본 소비자들은 다른 국가와 달리 모바일 콘텐츠에 쉽게 지갑을 여는 편이다. 특히 일본시장에서 네이버의 모바일 메신저 ‘라인’이 점유율 1위를 질주하고 있다. 국내 기업에겐 호재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최근 국내 배달앱 ‘배달의 민족’이 라인과 손잡고 일본 시장에 진출한 것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정: 개인적으로 일본 스타트업 시장의 성장세는 부러운 수준이다. 전반적으로 보수적인 일본 기업 문화 속에서도 스타트업에 대한 일본 내 관심은 매우 뜨거운 편이다. 1년 만에 무려 400억 원을 투자받은 회사도 있다고 들었다.
임: 어쨌든 나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2014년 스타트업 생태계를 돌아보고 싶다. 물론 힘든 한 해였지만 스타트업 생태계가 가능성을 보여줬다고도 생각한다. 특히 스타트업이 개별 기업이 아닌 하나의 ‘스타트업 월드’로 뭉쳐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요즘 핫한 스타트업 ‘배달의 민족’을 예로 들어보자. 불과 3년 전만 해도 모든 사람들은 ‘그게 되겠어’라고 말했다. 배달앱 시장에선 주류 기업이었지만 철저히 ‘찌라시’ 취급을 받아왔다. 하지만 지금은 보는 그대로다. 다소간의 논란은 있을 수 있지만 결국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정: 임 대표의 말도 일리가 있다. 사실 게임 스타트업을 바라보는 시선도 다르지 않았다. 일부에선 결국 넥슨, 엔씨소프트 같은 대기업이 독점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 보면 넥슨과 엔씨는 모바일 시장에서 만큼은 큰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게임업계에서 10년 가까이 일한 나조차도 놀라는 하루 하루가 전개되고 있다.
임: 우리도 실리콘밸리와 같은 생태계를 만들 수 있다. 2조5,000억 원 가치의 소셜커머스 쿠팡이 무려 3,000억 원을 투자받았다. 우리나라도 ‘스타트업 월드’가 크게 문을 열 날이 머지않았음을 느낀 한 해였다.
박: 나는 올해를 기점으로 우리사회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한 가지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대기업과 스타트업의 가능성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기업의 성장 가능성을 높게 본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외형적 성장이 곧 ‘일을 잘한다’와 직결되는 건 아니다. 개인적으로 스타트업이 대기업보다 (일을) 잘 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이러한 인식이 자리 잡으면 비로소 스타트업 월드가 완성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자: 스타트업이 더 일을 잘할 수 있다는 근거는 아무래도 조직구성에 있다고 본다. 하루하루 변하는 트렌드 속에서 빠르게 의사결정을 하기 위해선 아무래도 소규모 조직이 적합할 것 같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스타트업을 이끄는 리더의 역할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세 사람이 생각하는 리더의 자격은 무엇인가?
정: 리더는 성과로 증명해야 한다. 예를 들어보자. 애플 창업자 스티브잡스 Steve Jobs,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조스 Jeff Bezos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독불장군’ 리더들이다. 스티브 잡스는 회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들면 그 자리에서 해고 통지를 내렸다고 한다. 자칫 나쁜 리더로 비칠 수도 있지만 아무도 그들을 욕하지 않는다. 이유는 바로 성과다. 애플과 아마존이 실패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잡스와 베조스가 없었다면 애플과 아마존은 그저 그런 회사로 남았을 것이다.
기자: 그럼 정 대표는 자신을 잡스처럼 카리스마로 무장한 리더라고 생각하나?
정: 난 여리다. 팀원에게 소리를 지른 날에는 밤에 잠도 못 이룬다.(웃음)
박: 나는 설득의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본다. 스타트업에 합류하려는 사람들 대다수는 당장의 성과가 아닌 회사의 비전을 본다. 그리고 비전이 있다는 점을 설득하는 작업은 온전히 리더의 몫이다. 나 또한 한 번의 실패가 있더라도 두 번째 도전에 나설 수 있도록 직원들을 설득하는 일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걸 느낀 적이 있다.
임: 스타트업의 리더는 대기업 리더와 확연히 달라야 한다. 대기업에서는 한마디면 일사천리다. ‘지시하면 따르라’고 하면 그대로 진행되는 게 대기업의 생리다. 하지만 스타트업은 다르다. 개성 강한 전문가들이 꿈 하나 믿고 모인 집단이기 때문에 믿음을 주고 설득을 해야 한다. 하지만 때론 나도 리더인 내 말을 믿고 들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간곡히 부탁해도 조직원들이 안 들어 주는 경우도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이런 문화가 좋다. 치열한 토론은 조직에 생기를 불어넣으니까.
정: 김범수 의장도 한마디 지시를 해도 곧이곧대로 넘어가는 게 없다며 가끔 임 대표를 생각하면 괴롭다고 하더라(김범수 다음카카오 의장은 케이큐브벤처스의 공동 창업자다).
임: 자주 못 만나서 다행이다.(웃음) 나는 또 다른 리더의 조건으로 솔선수범을 말하고 싶다. 앞서 언급한 스티브 잡스도 때로는 직원들에게 인격적인 모욕을 주고, 독불장군의 모습을 보였지만 아무도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없었다. 이유는 단순하다. 아무도 스티브잡스보다 치열하게 고민하며 일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인격적인 모욕을 주고 난 후 휴양지로 놀러 가서 망중한을 즐겼다면 상황은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잡스는 그 누구보다 솔선수범해서 일을 했다. 그가 지금까지도 존경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기자: 화제를 돌려보자. 스타트업을 막 시작한 후배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에게 한마디 조언을 해준다면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박: 버텨라. 무조건 버텨야 산다고 말해줄 것 같다. 사업은 예측이 불가능하다. 야구에서 좋은 타자를 가름하는 기준 중 하나가 바로 타율 3할이다. 3할 타자는 타석에 10번 들어서면 7번 아웃 되더라도 3번은 안타를 친다. 다시 말해 7번 아웃 돼도 3번의 안타 때문에 좋은 타자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 아웃에 좌절해 타석에 들어서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면 운동선수가 될 수 없다는 얘기다. 스타트업도 마찬가지다. 항상 최악을 생각해야 한다. 7번 실패하더라도 3번의 성공을 기다리며 버텨야 한다.
임: 버티는 건 매우 중요하다. 우리 회사 공동창업자인 김범수 의장도 한게임을 그만둔 뒤, 수많은 도전과 실패를 경험했다. 하지만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기회를 노리며 버텼다. 그리고 카카오로 성공의 실마리를 풀어나갔다.
정: 성공의 실마리가 풀리면 그 후 항상 문제점이 나타난다. 예컨대 모바일 앱의 경우 서비스 사용자가 늘어나면 트래픽 과부하가 발생한다. 업체 입장에선 서버 안정화를 해결할 수 있는 엔지니어를 더 뽑아야 한다. 기회를 살리기 위해 공격적인 마케팅 전개도 필요하다. 이를 위해선 돈이 필요하다. 투자의 중요성은 여기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기자: 말이 나왔으니 투자영역에 대해 얘기해 보자. 투자를 하는 벤처캐피털(VC)과 투자를 받는 입장은 서로 생각하는 바가 다르다. VC 입장에선 수익을 내주길 기대하고, 투자받는 창업자 입장에서는 이러한 기대를 부담스러워한다. 이럴 때 소위 ‘갑과 을’의 관계가 형성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적어도 스타트업에 있어선 투자자와 창업자의 관계가 ‘갑과 을’이 아닌 ‘파트너’가 돼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정: 투자자와 창업자의 관계가 단순히 자금에 한정되어선 곤란하다. 물론 자금도 중요하다. 성공이라는 기차를 움직이기 위한 연료가 바로 자금이니까. 하지만 기차가 나아가야 할 방향 역시 중요하다. 그리고 올바른 방향을 함께 공유하는 것이 바로 투자자와 창업자의 관계여야 한다. 동종 업계의 정보를 제공하고, 때로는 벤처 간 협력을 지원하는 것이 투자자의 올바른 모습이라 할 수 있다.
박: 나도 그런 부분에서 좀 안타까움을 느낀다. VC와 창업자가 함께 가는 문화가 형성돼야 하는데 아직까지 국내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그런 문화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아무래도 돈 문제가 얽혀 있다 보니 본의 아니게 ‘갑과 을’의 형태로 변질되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케이큐브벤처스와 임 대표의 활동은 귀감이 된다고 생각한다. 절대 내가 투자를 받아서 이런 얘기를 하는 건 아니다.(웃음)
정: 전적으로 동감한다. 예컨대 케이큐브벤처스는 매달 ‘패밀리데이’를 개최한다. 케이큐브를 통해 네트워크가 형성된 벤처 CEO들이 한자리에 모여 정보를 공유하고 인맥을 쌓는 행사다. 사실 다른 사업영역의 대표들과 친해지기는 쉽지 않다. 만날 기회가 없으니까. 하지만 우린 매달 패밀리데이 행사를 통해 친분을 쌓고 서로의 상황을 공유하고 있다. 때로는 소주잔을 기울이며 신세 한탄을 하기도 한다. 새벽 4시까지 술을 마시면서 신세 한탄을 하다 보면 사업이 힘들다고 우는 친구들을 볼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가슴이 참 먹먹해진다.
박: 대다수 VC는 첫 만남에서 “내가 이만큼의 투자를 하면 얼마의 수익을 안겨줄래?”라고 묻곤 한다. 첫 만남에서 구체적인 숫자를 들먹이는 VC는 결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하지만 임 대표는 단 한 번도 숫자를 얘기하지 않았다. 오로지 이야기만 했다. 미래를 예측한 후 예상 정답을 내놓은 곳에 투자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측 불가능한 미래에 투자하려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예상 수익이 아닌, 사람과 기술에 우선 투자하는 VC가 많아진다면 창업가들의 도전 의지도 더욱 높아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기자: 결국 VC와 창업가는 파트너가 돼야 한다는 결론인 것 같다. 마지막 질문이다. 창업을 준비하는 후배 예비 창업자들에게 생존을 위한 조언을 해준다면.
임: 자기 자신에게 ‘왜?’라는 질문을 던졌으면 한다. ‘내일부터 중국어를 배워야지’, ‘내일부터 다이어트를 해야지’보다 중국어를 왜 배워야 하고, 왜 다이어트를 해야 하는지 먼저 생각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스타트업이 성공을 하기 위해선 끝까지 생존해야 한다. 생존하기 위해선 내가 왜 이 일에 모든 것을 바쳐 도전해야 하는지 이유를 먼저 찾아야 한다. ‘왜?’라는 질문에 스스로 납득할 만한 답을 찾고 난 후 사업에 도전하길 권한다.
정: 쉽게 생각하는 사람은 쉽게 포기한다. ‘너도나도 벤처를 하는 것 같으니 나도 해볼까’라는 생각으로 뛰어들면 결코 생존할 수 없다. 깊이 있는 고민과 각오가 있어야 한다.
박: 나는 두 가지를 말하고 싶다. 우선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도전해야 한다. 주변에 좋은 아이템을 가진 예비 창업자들 중 ‘빈털터리’가 될 두려움 때문에 도전을 멈추는 경우를 종종 보았다. 솔직히 23살에 창업해 3년 동안 일하다 회사가 망해 빈털터리가 됐다고 치자. 그러면 고작 26살이다. 돈 없어 부모님께 용돈을 타서 써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43살에 창업을 해서 망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망설이는 순간, 그 사람은 한 발 뒤처진 채 출발하는 것이다.
정: 박 대표의 말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박 대표 역시 27살에 창업했기 때문에 젊은 예비 창업자들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할 듯하다. 그런데 나머지 하나는 뭐지?
박: 군대다. 남자는 군대를 갔다 와서 창업을 하라고 말하고 싶다. 군필과 미필의 차이는 크다.
임: 남자는 군대, 그럼 여자는?
박: 여자? 그냥 창업만 좀 해줬으면 좋겠다. 여자가 너무 없다.(웃음)